역사적 인물

 

 왕비(王妃)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4세)(文宗妃) 순종(順宗) 선종(宣宗) 숙종(肅宗) 탄생

인경현비(仁敬賢妃)(4세)(文宗妃) 인절현비(仁節賢妃)(4세)(文宗妃)

장경주(長慶宮主)(5세)(順宗妃) 정신현비(貞信賢妃)(5세)(宣宗妃)

사숙태후(思肅太后)(5세)(宣宗妃)헌종(獻宗) 탄생

원신궁주(元信宮主)(5세)(宣宗妃)

문경태후(文敬太后)(6세)(睿宗妃)인조(仁宗) 탄생

연덕궁주(延德宮主)(6세)(仁宗妃)복창원주(福昌院主)(6세)(仁宗妃)

 

또한, 외손으로서 왕비에 오른 분이 현종 왕비인 원성태후 김씨(元城太后 金氏), 원혜태후 김씨(元惠太后 金氏), 원평왕후 김씨(元平王后 金氏)와 그 분들을 통해서 탄생하신 덕종(德宗), 정종(靖宗), 문종(文宗) 임금님, 그리고 열 한 분의 왕자, 공주이면서 왕후가 되신 인평왕후(仁平王后), 효사태후(孝思太后)를 포함하여 네분의 공주와 예종(睿宗) 왕비인 경화왕후(敬和王后), 선종(宣宗) 왕비인 문정왕후 왕씨(文貞王后 王氏)를 모두 치면 1009년부터 1146년 사이에는 인천이씨 일문과 연관을 갖지 않은 왕은 없었다. 즉, 열 분의 임금님은 모두 인천 이씨 또는 인천 이씨 외손의 소생이었거나, 인천 이씨를 왕비로 맞이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인천 이씨가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면서 모두 벼슬길에 나서 일찍 세상을 떴거나 불문에 들어간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높은 벼슬에 올라 3세에서 6세까지 4대에 출생한 49명 중에서 6명이 불가에 들어가고 나머지 43명중 재상(조선조의 정승)에 오른 이들이 18명이나 되어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장손 이자연(李子淵)은 뛰어난 인품과 탁월한 능력으로 네왕을 섬기며 조정을 이끌었으며 문물제도 정비와 왕실의 안정에도 역할을 담당하여 추성좌세보사공신 문하시중 개부의 동삼사 수태사 감수국사 상주국 경원군 개국공(推誠佐世保社功臣 門下侍中 開府儀 同三司 守太師 監修國史 上柱國 慶源郡 開國公)에 올라 식읍 삼천호(食邑 三千戶)를 받았고 사후에 중서령(中書令)에 장화(章和)의 시호(謚)를 받았는데 장화공이야말로 인천이문(仁川李門)이 고려벌족(高麗閥族)중 가장 세를 떨친 벌족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나머지 손자에 이자상(李子祥)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이성간(李成幹)은 상장군 태자소보(上將軍 太子小保) 이다.

3세부터 6세까지 재상(宰相)에 오른 이들은

정1품 중서령(中書令) 이자연(3세), 이자겸(李資謙)(5세)

정2품 문하시주 이정(4세), 이공수(李公壽)(5세)

종2품 평장사(平章事)

이의(4세), 이호(李顥)(4세), 이전(4세). 이안(李顔)(4세)

이예(李預)(4세), 이오(4세), 이자덕(李資德)(5세)

이자량(李資諒)(5세), 이지무(李之茂)(6세), 이광진(李光縉)(6세)

좌우복야(左右僕射)

이자상(李子祥)(3세), 이언림(李彦林)(5세), 이식(李軾)(6세)

이지저(6세) 등이다.

 

그리고 학행, 문장, 외교로 인천이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예종(睿宗)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대악서승(大樂署丞)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춘천의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소식포의(蔬食布衣) 하면서 선학(禪學)의 연구로 평생을 마친 청평거사(淸平居士) 진락공 이자현(眞樂公 李資玄)이 있으니 예종의 간곡한 부름에도 강(임진강)을 건너지 않았고 세속의 영화에 초연하였다. 후에 조선의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은 그의 고절(高節)을 찬양하였다.

 

쌍명재 이인로(雙明齋 李仁老)는 문장으로 나라 안팎에서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주자(朱子)를 뵙고 학문의 요령을 배웠으며 은대(銀臺), 쌍명(雙明), 파한(破閑) 등 문집 셋을 남겼다.

 

문진공 이장용(文眞公 李藏用)은 고종(高宗)과 원종(元宗)을 섬겨 정당문학 중서시랑 평장사 태자태부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는데 문장이 뛰어나 한 시대의 큰글이 그의 수중에서 많이 나왔다. 몽고와의 승산 없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왕과 권신들의 주저와 반대에도 불구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원종(元宗)의 원나라 행을 성사시켰으며 자신이 임금을 모시고 원나라에 들어가 황제와 독대하여 정정당당하고 의연하게 고려의 입장을 밝혀 당시 전쟁종식의 장애가 되었던 출육(임금의 거처를 강화섬에서 개성으로 옮기는 것) 문제를 해결하였고 또한 원이 고려에 요구한 군사/물자증발을 완화시켜 40여년 전쟁으로 극도로 궁핍한 백성들의 군량미 조달과 병역부담을 덜어주었는데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한 백성들에게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젊은이는 전쟁에서 희생되고 노약자와 부녀자, 어린아이들만 남아있어 농사도 이들이 담당하는 참담한 실정이었기 때문에 만일 그 이상의 가혹한 군량미 수거나 군사동원이 있었다면 백성들을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처참한 실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공이 보여준 높은 애국심, 깊은 학문 그리고 고매한 인격은 마침내 원의 황제(세조)와 대신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하여 원의 황제는 두 차례나 공을 위하여 연회를 열어주었다.

 

연산군 원굉(連山君 元紘)은 시에 능하였으며 정당 문학을 지냈다. 그의 따님이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의 세자빈(世子嬪)이 되었는데 고려가 멸망하자 충절을 지켰으며 억지로 벼슬을 주었으나 신왕조에 협조하지 않았다.

 

공도공 이문화(恭度公 李文和)는 우왕때 장원급제하여 고려에 벼슬하였는데 이태조의 혁명후 불려나와 도승지 대사헌 이조 예조 형조 판서와 의정부 좌참찬과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6남이 모두 경재상(卿宰相)의 자리를 올랐다.

 

 

 여서(女壻)

 

이씨의 사위로서 현달하여 중시조가 된 분으로는 제일 먼저 이성간(李成幹)의 사위인 파평 윤관(坡平 尹瓘)을 들 수 있는데 공은 문무를 겸비하여 여진을 쳐 물리치고 육진을 개척하였고 문하시중, 판상서(判尙書)를 역임하고 영평현 개국백(鈴平縣 開國伯)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공의 아들 대복소경(大僕小卿) 언민(彦旼), 중손 상서(尙書) 종악, 현손 녹사(錄事) 부원(復元) 등도 이씨의 사위가 되었다.

 

광산인(光山人) 김약온(金若溫)은 이정의 사위로 문하시중을 지냈고 시호가 사정(思靖)이며 그의 아우인 김의원(金義元)은 이석(李碩)의 사위인데 검교태자대사호부상서겸삼사사 특진 금자광록대부 중서시랑평장사(檢校太子太師戶部尙書兼三司使 特進 金紫光祿大夫 中書侍郞平章事)의 벼슬에 충정(忠貞)의 시호를 받았는데 오늘날 광산김씨(光山金氏)는 모두 이들의 후손이다. 충정의 아들인 광중(光中) 또한 이식(李軾)의 사위였다.

 

강릉 김인존(江陵 金仁存)은 이호(李顥)의 사위인데 검교태사 문하시중을 지냈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그의 큰아들 김영석(金永錫) 또한 이공수(李公壽)의 사위로 중서시랑 평장사에 올랐는데 강릉 김씨의 대부분이 이들의 후손이다.

 

남평 문공원(南平 文公元)은 평장사로 시호가 정경(貞敬)인데 이의의 사위이다.

 

 

아래 세(世)를 클릭하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2세(二世)

8세( 八世 )

15세(十五世)

21세(二十一世)

27세(二十七世)

3세(三世)

9세( 九世 )

16세(十六世)

22세(二十二世)

30세(  三十世 )

4세(四世)

10세( 十世 )

17세(十七世)

23세(二十三世)

31세(三十一世)

5세(五世)

12세(十二世)

18세(十八世)

24세(二十四世)

32세(三十二世)

6세(六世)

13세(十三世)

19세(十九世)

25세(二十五世)

33세(三十三世)

7세(七世)

14세(十四世)

20세(二十世)

26세(二十六世)

대고록(누락부분)

역사적 인물

본문

mark.png 2세(二世)

back.gif

 

이   한(李   翰)

겸(謙)의 子이며 벼슬이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고 문경(文景)의 시호를 내렸다.

이   진(李   玲)

한(翰)의 아우이며 처음 이름이 방연(芳衍)이요, 벼슬은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