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사진
유적지사진

back.gif

본문

mark.png 백운정(白雲亭)

back.gif

 

y13-1.jpg

백운정

 

y13-2.jpg

이화상 교지

백운정(白雲亭)은 조선조(朝鮮朝) 최말조(最末造)의 유학자(儒學者)인 백운 이화상(白雲 李華祥:1842-1915)의 강학지소(講學之所)이다 백운 이화상(白雲 李華祥)은 자 재중(字 載重) 호 백운(號 白雲) 관 인천(貫 仁川)이다. 상서좌복야 상주국소성현개국후(尙書左僕射 上柱國邵城縣開國侯) 인천 이허겸(仁川 李許謙)을 상조(上祖)로하고 조선조 문형 공도공 이문화(朝鮮朝 文衡 恭度公 李文和)의 후손(後孫)이며 임진난(壬辰亂)때 창의(倡義)한 거유(巨儒) 육휴당 이주(六休堂 李)는 백운(白雲)의 9대조(九代祖)이다. 백운(白雲)은 헌종(憲宗) 8年 임인(壬寅西紀1842年)11月 상한(上澣)에 대구 무태리제(大邱 無怠里第)에서 태어나 을묘(乙卯西紀1915年) 4月 4日 백운정 내실(白雲亭 內室)에서 장서(長逝)하니 향수(享壽) 74였다. 천품(天稟)이 온량순혜(溫良純慧)하고 재기출중(才器出衆)하더니 중부(仲父) 금서진사(琴西進士)의 사숙(私塾)에서 초학(初學)하고 이어 임재서찬규(臨齋徐贊奎)에게 사사(師事)하였으며 고종(高宗) 원년(元年西紀1864年)갑자(甲子)에 연방(蓮榜)에 오르니 약관(弱冠) 23歲였다.

 

백운(白雲)의 학연(學淵)과 학통(學統)이 기호학파(畿湖學派)에 속(屬)하며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닦은 백운(白雲)은 학덕(學德)이 높은 진사(進士)로서 당대(當代) 명성(名聲)이 자자(藉藉)하였다.

 

낙양지원(洛陽之園)을 방불(彷佛)케 한 무태리(無怠里) 산(山)중턱에 아담(雅淡)한 백운정(白雲亭)을 지어 도학(道學)을 연찬(硏鑽)하면서 후학(後學)들을 훈도(薰陶)하였다.

 

백운(白雲)이 남긴 창해유주격(滄海遺珠格)인 언지(言志)가 비록 98수(首)밖에 전(傳)하지 않으나 자자구구(字字句句)에 어린 서정(抒情)은 백일(白日)에 홍애(紅霓) 같다.

 

그 시체별(詩體別)로 표시(表示)하면

 

고체시(古體詩)   古詩   五言古詩  6首

                              七言古詩  1首   計 7首

                     絶句   五言絶句

                              七言絶句  41首  計 41首

 

근체시(近體詩)    律    五言律     4首

                             七言律    43首  計 47首

                     排律   五言排律   2首

 

칠언배율(七言排律) 1首 計 3首이다. 근체시중(近體詩中)에 칠절(七絶)과 칠율(七律)이 84首로서 그의 유주중(遺珠中)에서 거의 9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中에도 금강가(金剛歌)는 칠언고시(七言古詩) 176구(句) 웅편(雄篇)으로 대표작(代表作)이라 할 수 있다.

 

문장(文章)의 중용문목(中庸問目)과 대학문목(大學問目)은 그 학문적(學問的) 심도(深度)를 규지(窺知)할 수 있다.

 

백운(白雲)은 학자(學者) 시인(詩人)일뿐 아니라 문장가(文章家)로서 서(序), 기(記)의 옥고(玉稿)를 많이 남겼으며, 당대(當代) 교남(嶠南)의 대표적 작가(代表的 作家)였다.

 

y13-3.jpg

백운 이화상 묘

y13-4.jpg

     백운 이화상 묘,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