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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png 서계서원 사적비명(西溪書院事蹟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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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옛날 西溪書院(서계서원)의 遺址(유지)이다. 西溪書院(서계서원)은 朝鮮(조선) 太宗朝(태종조) 名臣(명신) 恭度公(공도공) 烏川 李先生(오천 이선생)을 主享(주향)으로 하고, 先生의 八世孫인 苔巖 李公(태암 이공)을 配享(배향)으로 한 書院이었다. 烏川先生은 諱文和 字伯中(휘 문화 자 백중)이니 仁川人이다. 高麗 恭愍王(고려 공민왕) 七年 戊戌生(무술생)이니 高麗 尙書左僕射 上柱國 邵城縣 開國後 諱 許謙(고려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 휘 허겸)의 十四世孫이요 中書舍人知制誥 諱 益歲(중서사인지재고 휘 익세)의 孫이요 典工判書 諱 深(전공판서 휘 심)의 子이다.

 

어려서 栗亭 尹澤(율정 윤택) 先生에게 受學하였고, 커서는 牧隱 李穡(목은 이색)과 圃隱 鄭夢周(포은 정몽주) 兩 先生 門下에 從遊(종유)하였고, 陽村 權近(양촌 권근), 陶隱 李崇仁(도은 이숭인), 桑村 金自粹(상촌 김자수), 諸賢(제현)과 道義交(도의교)로서 文章經術(문장경술)이 當世(당세)에 드러나시었다. 朝鮮 太宗朝(조선 태종조)에는 諫議大夫 京畿道 按廉使 都承旨(간의대부 경기도안렴사 도승지)를 歷任(역임)하였고, 太宗朝에는 禮戶刑曹判書(예호형조판서), 嶺湖南按廉使(영호남안렴사), 左參贊議政府事(좌참찬의정부사)를 거쳐서 藝文館, 成均館大提學(예문관 성균관대제학)을 지냈다.

 

 太宗十四年 甲午에 考終(고종)하시니 享年(향년) 五十七歲였다. 大匡輔國崇錄大夫 議政府領議政(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贈職(증직)되었고 諡恭度(시공도)라 내리었으니 즉, 尊賢貴義曰恭(존현귀의왈공)이요 心能制義曰度(심능제의왈도)라는 諡法(시법)에 依(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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苔巖公(태암공)은 諱字景任(휘주자경임)이요 又號(우호) 六休堂(육휴당)이니 明宗 丙申生(명종 병신생)으로서 全溪東慶昌(전계동 경창) 門下에 從遊(종유)하였고 鄭寒岡 逑(정한강 구), 張旅軒 顯光(장여헌 현광), 徐樂齋 思遠(서낙재 사원), 諸賢(제현)과 道義交(도의교)로 지내더니 壬辰亂(임진난)이 일어나자 義憤(의분)을 참지 못하여 徐樂齋 思遠(서낙재 사원), 孫慕堂 處訥(손모당 처눌), 郭槐軒 再謙(곽귀헌 재겸), 蔡投巖 夢硯(채투암 몽연), 朴摠管 忠後(박총관 충후), 李軍威 宗文(이군위 종문), 崔萬頃(최만경) 諸公(제공)과 뜻을 모아 義兵(의병)을 일으켜서 公事員(공사원)으로서 大將(대장)에 推戴(추대)되었다. 解顔倉(해안창) 占據倭兵(점거왜병)을 討伐(토벌)하여 倭首(왜수) 三名과 賊卒(적졸) 百餘給(백여급)을 (참괵)하였고, 漆谷 八(칠곡 팔거)에서 三戰三捷(삼전삼첩)의 戰功(전공)을 세웠고, 全羅道 長水(전라도 장수)에서 數千 倭兵을 물리쳐서 招諭使(초유사) 鶴峯 金誠一(학봉 김성일)과 體察使(체찰사) 漢陰 李德馨(한음 이덕형)에게 크게 奬許(장허)를 받았다. 亂靖後(난정후)에는 褒薦(포천)을 굳이 辭讓(사양)하고 山林에 돌아가서 한 讀書士(독서사)로서 大邱鄕校(대구향교)를 重建(중건)하고 各處(각처) 祠院(사원)을 補修(보수)하여 後進養成(후진양성)과 鄕學振興(향학진흥)에 힘을 다하였다. 愚伏 鄭經世(우복 정경세)先生은 本道 觀察使(본도 관찰사)로 와서 南來得一畏友(남래득일외우)라 하였고 忠翼公 李時發(충익공 이시발)은 斯文鼎新 扶植吾道(사문정신 부식오도)라 하였다. 宣祖 甲辰 二月二十七日에 卒하였다.

 

이 西溪書院이 이룩된 것은 正祖 五年 辛丑 西紀 一七八一年에 士林(사림)의 公議(공의)에 依하여 烏川(오천)先生 獨享(독향)으로 創設(창설)되었다가 二十年後인 純祖 元年 辛酉 西紀 一八0一年에 苔巖公(태암공)을 配享(배향)하였다.

 

  創建以後(창건이후) 八十八年間을 士林(사림)과 姓孫(성손)들의 極盡(극진)한 誠意(성의)로 春秋奠享(춘추전향)과 講禮修學(강례수학)을 지키어왔으니 兩先生의 扶國扶敎(부국부교)의 精神(정신)이 이 南州一帶(남주일대)에 길이 남을 일이어늘 滄桑世劫(창상세겁)은 尊賢慕義(존현모의)도 持續(지속)하기 어려웠는지라 高宗戊辰 西紀 一八六八年에 書院毁撤令(서원훼철령)에 依하여 荒凉(황량)한 草原(초원)으로 廢墟(폐허)만이 남게 된 것이다. 姓孫(성손)들의 罔極(망극)과 士林(사림)들의 失意(실의)는 憤鬱(울분)의 情(정)을 참지 못한 것이 우금(于今)百二十年이라. 姓孫(성손)으로서나 士林(사림)으로서나 當然(당연)히 復元(복원)을 꽤할 일이었지만은, 事大力綿(사대역면)하여 爲先(위선) 이 돌을 세워서 遺蹟(유적)을 밝히고 復元事業(복원사업)은 앞으로 國家(국가)의 安定(안정)과 文敎(문교)의 再興(재흥)을 기다려서 이룩될 날이 있으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光復後 四十三年 丁卯秋 西紀 一九八七年

眞城后人 李壽洛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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