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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재(金山齋)는 자는 중율(仲栗) 호는 퇴옹(退翁) 휘 적(績)의 묘각이다.
19세에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及第 하였으나 출사(出仕)에 뜻이없어 과업을 거두고 경남 합천 삼가 대평에 이주하여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을 스승으로 섬기고 성리학 공부에 열중하니 나날이 진취하는 자세를 바라본 사문(師門)에서는 칭송이 자자했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사우록(師友錄)에 이르기를 영민한 재주와 독실한 의(義)와 행(行)이 그 스승과 비슷하고 중용과대학을 공부하여 그 진수에
취하여 더욱
열중했고 또 시(詩)는 시계(詩界)의 현묘한 경지를 찾은듯 정교했고 세상일의 명리(名利)에는 담담하였다고 했으니 그 사실이 삼가읍지(三嘉邑誌)에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