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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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png 단서각(丹書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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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원군 묘소 (경남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사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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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원군 교지(敎旨)

 

  유사(遺史)  

 

인원군은 1568년(선조1년) 무진(戊辰)에 함안 명관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자는 사장(士長)이요 호는 양졸정(養拙亭)이시고 참찬의정부사(參찬議政府事) 겸 예문관 대제학(예文館 大提學)을 지낸 공도공(恭度公) 휘 문화(文和)의 8대손이며 인산군(仁山君) 휘 인(寅)의 아드님이시다.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서 강경하고 고결하며 의젓하고 정중하며 8세때 외숙인 황암(황암) 박재인(朴齋仁)에게 소학을 배우고 이어 황곡(황谷) 이칭(李칭)의 문하에서 수학함에 기대가 더욱 원대하였다.

18세때 경서와 사서에 널리 통하고 장성하매 미처 정한강(鄭寒岡)선생을 뵙고 심경(心경)을 깊이 연구하니 당시의 동료들이 추종하는바가 되고 향리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25세때인 임진(壬辰1592)년에 왜구가 대거 침입하여 그 해 6월에 양친과 형님내외가 왜적에게 살해 당하였을 때 공은 양친의 시신을 안고 기절했다.

왜적은 공도 죽은줄 알고 그대로 지나갔다.

조금후 공은 소생하여 밤에 어버이의 시신을 등에 업어 선영아래에 토빈을 마련하여 이내 그 자리에 장사를 지내고는 황암 박재인을 따라 진주(晉州) 갈동(葛洞)으로 피난하였다.

27세때 그곳에서 복상을 마치고 상복을 벗자 피눈물을 흘리면서 흐느껴 울고 붓대를 버리고 맹세하기를 나라의 치욕과 가문의 원수인 왜적과 한하늘 밑에서 같이 살 수 없다하여 진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진주와 의령 함안등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모집한 의병을 이끌고 곽망우당(郭忘憂堂)의 창년(昌寧)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달려가 힘을 합쳐 왜적토벌에 동분서주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7년간의 왜란이 끝난 후에도 공은 계속 무예를 닦아 1606년 병오((丙午)에 무과(武科)에 장원하였다.

승의부위(承義副尉)로 벼슬길에 나아가 1612년에 관찰사 최인재(崔認齋) 현(晛)의천으로 구산모병장(龜山募兵將)이 되어서 군대의 규율을 창립하여 군의 형편이 크게 떨쳤다.

선략장군(宣略將軍) 진위장군(振威將軍)으로 승진 훈련도감(訓練都監)으로 전보되었다.

1617년에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하여 남해 미조항진(미助項鎭)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에 임명되어 흩어진 군사를 어루만지며 무너진 성을 보수하고 전함관사에 이르러서도 모두가 구조를 바꾸게 되니 사람들은 문무(文武)겸비한 인재라 칭찬하였다.

임금(선조)은 비옥(緋玉→당상관의 관복)을 하사하여 표창하였다.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자 공은 조정으로 돌아왔다. 또한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을 쫓아 황주(黃州)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인조2년에 자산군수(慈山郡守)에 임명되어 미쳐 부임하기전에 역적 이괄(李适)이 한명련(韓明璉)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켜 승승장구하여 곧장 서울을 침범하였다. 이에 도원수는 공으로 하여금 별장(別將)을 삼아 평양도 순천군수(順川郡守)의 임시서리를 겸임시켜 군사 천명을 주어 선봉장(先鋒將)을 삼고 군무(軍務)를 일임 시켰는데 미처 임소에 당도하기 전에 임금(인조)께서는 이미 공주(公州)로 피난시키고 적세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도원수 장만은 안현(鞍峴→무악재)에 진을 치고 공은 포수 2천명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제일 요새지를 점거하니 적군은 정예부대를 총동원하여 공격을 감행하였다.

육박전이 벌어지자 늦은 아침에 이르도록 역전(力戰)하여 적군의 살상이 심히 많으니 적세가 허물어지어 드디어 적병이 크게 패하여 이괄 한명련등 아홉의 적 장수들의 목을 베어 올렸다.

 

임금은 서울로 돌아와서 개선한 여러 장수들에게 술을 권하고 공에게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시키고 갈성분의진무훈(碣誠奮威振武勳)에 책록 하였으며 인원군(仁原君)에 봉(封)하였고 부조증삼대(父祖曾三代)를 추증(追贈)했으며 백금 십정(十錠)과 전투 말 한 필을 하사하였다. 또한 상가서(賞加書)와 교서(敎書)가 내렸다.

그리고 평양도 순천군수(順川郡守)로 임명하였다. 부임한 지 얼마 안되어 군정이 맑고 백성은 편안했다.

조정에서는 공이 크게 쓸 수 있는 인물임을 알고 바야흐로 병조참판(騎省次官)에 임용하려 했는데 공은 급작스레 병이 발생하여 이해 8월 28일로서 직소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임금은 비보를 듣고 슬프고 애석하게 여겨 천리 길에서 상여가 돌아오는데 도백(道伯)에게 호송을 명령하고 장례에 소요되는 물품을 지급하게 하고 전례관을 보내어 함안 백이산(伯夷山)에 반장되었다.

 

다음해인 1625년 을축에 회명제(會盟祭)를 거행하고 단서죽백(丹書竹帛 : 현재文化財)의 철권(鐵券)을 내리며 밭 60결(結) 노비(奴婢) 7구(口) 은(銀) 20량(兩) 표리(表裏→겉옷과 속옷) 일습(一襲) 내구마(內廐馬 : 궁중서 기른 말) 한 필을 하사하고 또 별상(別賞)으로 노비 8구를 하사하였다. 또한 기린각(麒麟閣)에 화상(畵像)을 봉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추증하였으며 견례관(遣禮官)으로 예조좌랑(禮曹佐郞) 김주(金輳)를 보내어 집에서 치제(致祭)캐 하고, 어제사제문(御製賜祭文)을 내렸으니 애영(哀榮)의 전례(典禮)가 구비하였다. 대사간(大司諫) 목만중(睦万中)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에 이르기를“가문을 일으키기 위하여 군 문에 투신했으니 만인의 우두머리요 진두(陣頭)에 앞장서 적군을 섬멸했으니 백세에 훈공(勳功)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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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천사전경 (道川祠全景)

  (경남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소재)

처음에는 효도에 뜻 두었는데 마침내 충성다했도다 남궁(南宮)에 운대(雲台 드높았으니 영명한 풍채 추억되노라 진양군(晉陽君) 유효걸(柳孝桀)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으로 더불어 공적 비슷했어라. 어이 수명 단축하여 오랑케 막지 못하게 했던가 저함안의 산기슭에 비석 드높았도다. 이에 기문(記文) 새겨 무궁한 후세에 길이 전하노라”하였다. 조은(釣隱) 한몽참(韓夢參)이 신도비명(神道碑銘) 찬하였다. 충현사(忠賢祠) 도계서원(道溪書院) 도천사(道川祠)에 향사되었다.

양졸정문집(養拙亭文集)이 전해지고 있다.

 

 

  어제사제문(御製賜祭文) - (仁祖임금께서 내린 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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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사(道川祠:인원군을 모신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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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도천사 여재문

천계(天啓)五年七月十四日에 국왕(國王)은 예조좌랑(禮曹佐郞) 신(臣) 김주(金輳)를 보내어 고 인원군(故仁原君) 이휴복(李休復)의 영령(英靈)에 유고(諭告)하노라. 오직 영령(英靈)이여 전번에 국운(國運)이 불행(不幸)하여 적신(賊臣)이 날뛰었도다. 도성(都城)이 함락되고, 난여(난輿)는 파천(播遷)했노라. 안현(鞍峴)의 싸움에서, 의사(義士)들 분발했도다. 편장(偏將)으로서 앞장에 섰으니, 그 누가 경(卿)의 공적에 비교하리? 장차 크게 등용(登用)함을 기약하고, 우선 군수(郡守)에 임명했노라. 관직은 재능에 비교되지 못했는데, 어이하여 세상 떠나단말인가? 대려(帶礪)의 맹서(盟誓)에는, 덧없는 죽음 애절하구나. 이에 제전(祭奠)을 올려, 지하의 영혼 위로했노라. 바라노니 이 자리 강림(降臨)하여, 내 은명(恩命)의 잔을 흠향할 지어다.

(天啓五年=1625年)

 

 

  어사단서죽백(御賜丹書竹帛) 문화재

 

갈성분위진무공신가선대부행순천군수인원군 이휴복에 내리는 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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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서:단서죽백(敎書:丹書竹帛)

 

임금께서 이렇듯이 말씀하시기를, 변란(變亂)에 임하여 순국(殉國)의 충절 이미 나타났으니, 공신의 봉작(封爵) 내리어 훈공(勳功)에 보답하는 전장(典章)을 거행하도다. 이에 공신(功臣)의 철권(鐵券){공신에게 나누어 주던 훈공을 기록한 책}을 반포하여, 옛 헌장(憲章)에 준하노라. 오직 경(卿)은 가슴에 많은 무술을 간직했으니, 한 몸 전체가 담(膽)덩이로세. 일찍이 변방(邊方)에 종사(從事)하여 활 쏘는 재주 뛰어났고, 만년(晩年)에는 원수(元帥)의 추천(推薦)을 입어 직무(職務)에 명성(名聲) 떨쳤어라. 오랫동안 별장(別將)의 임무 띄고, 날랜 보병(步兵) 통솔 했도다. 진퇴(進退)와 지속(遲速)의 호령 엄숙했으니 강개(慷慨)한 의기(義氣) 격동하였고, 금목수화(金木水火)의 진법(陣法) 이룩했으니 위급한 시기에 적용하리로다. 저번 역도(逆徒)의 반란(叛亂)에 즈음하여, 가군수(假郡守)로서 군병(軍兵)을 동독했도다. 관문(關門)을 넘어오니 날뛰는 적군(賊軍) 뉘 막을손가? 갑옷 입고 병기를 잡은채 임금 위해 목숨 바쳤어라. 여러 우군(友軍)과 힘을 합쳐, 대의(大義)를 짚고 선봉(先鋒)에 나섰도다. 먼저 북악(北岳) 웅거하여 한번 싸움에 적군을 소탕했고, 남방(南方)에서 난여 돌아왔으니 국가는 다시 안정되었네. 큰 공훈(功勳)은 원수(元帥)에게 돌릴지라도, 승전(勝戰)의 실적(實績)은 그대를 힘입었노라. 이름은 청사(靑史)에 실렸으니 대려(帶礪)의 맹서 함께했는데, 몸은 천대(泉臺)로 돌아갔으니 덧없이 진일(辰日)의 슬픔에 잠겼어라. 능연각(凌煙閣)에 유상(遺像)은 볼 수 있으나 사람은 가 버렸고, 체백은 황천(黃泉)에 묻쳤으나 명성(名聲)은 길이 보존했도다. 이에 심등(三等)의 상전(賞典)과 사자(四字){성적을 표창한 말}의 포장(褒奬)을 내리고 훈공(勳功)을 책봉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 삼등(三等)을 삼고 초상화하여 후세에 전하게 했으며 품질(品秩) 일계급(一階級)을 승진시켰다. 그리고 그 부모와 처자에게도 관작(官爵)을 주어 또한 일계급(一階級)을 승진시켰으며 아들이 없으면 생질이나 사위를 대신 승진시켰고 적장(嫡長)은 벼슬을 세습하여 그 녹봉을 받게 했으며 영구히 유서(宥恕)의 은전을 받도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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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서각(丹書閣:丹書竹帛奉安閣)

인하여 반당(伴倘) 四人과 노비(奴婢) 七口와 구사(丘史) 二名과 전(田) 六十結과 은(銀) 二十兩과 안팍옷감 一段과 내구마(內廐馬) 一匹을 하사하니, 영수할지어다. 아! 이에 은명(恩命)을 내렸으니, 전(前)부터 충직(忠直)한 규범(規範) 있도다. 슬픔과 영화로움은 생사(生死)에 간격이 없었으니 내 어이 잊을손가? 복록(福祿)은 후손에까지 미처 경(卿)이 영원(永遠)히 누리리로다. 이에 교서(敎書)로서 유시하노니, 모두 알아야 할 일이다.

천계(天啓)五年(仁祖三年一六二五年)四月    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