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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金富軾)과 이자겸(李資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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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08-27 17:32 조회2,2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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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金富軾)과 이자겸(李資謙)


옛말에 한 사람의 위인(偉人)이 나면 천하를 바꿔 놓는다는 말이 있기도 하다.
金富軾(1075~1151)은 고려왕조(高麗王朝)가 낳은 대표적 지식인(知識人)으로 그의 문장력(文章力)과 정연(整然)한 논리(論理)는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고려 인종(仁宗) 때의 명신(名臣)이었고, 특히 고려의 국가적 정통성 확립(國家的 正統性 確立)과 정치노선(政治路線)을 정립(定立)하는데 노력한 대유학자(大儒學者)요 정치가(政治家)였다.
집필(執筆)하면 그이 문장(文章)에 붓이 울었고 조정(朝廷)에서 호령하면 백관(百官)이 굽혔으며 군대(軍隊)를 이끌고 전장(戰場)에 나가면 그 전략(戰略)이 뛰어났다. 어찌 그뿐이랴! 오늘날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랜 역사책(歷史冊)인 정사(正史) 삼국사기(三國史記)도 바로 金富軾이 주관하여 편찬한 것이다.
金富軾은 당시 고려 조정에서 무시 못할 존재(存在)의 위치에 있었는데 그의 논리적(論理的) 발언(發言)은 무거운 힘이 실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金富軾은 용기(勇氣)와 기백(氣魄)이 넘치는 성격으로 그는 오직 국가의 주인인 임금을 제외하고는 자기의 주장을 굽힐 줄 모르는 패기(覇氣)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가 반대하는 일은 대개가 되지 못했고 그가 주장하는 일은 거의 다 성취된 것도 사실이다.
한가지 사례(事例)를 들어보면 高麗 仁宗(17대)이 즉위하자 그의 외조부(外祖父)인 李資謙(?~1126)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李資謙은 앞서 순종(順宗)에게 자기누이를 왕비(王妃)로 보내고 또 예종(睿宗)에게는 딸을 왕비(王妃)로 맞게 하였으니 王의 (장인)丈人이 되어서 부귀(富貴)를 한 몸에 다하고 얼마 뒤에는 동덕추성좌리공신 소성군개국백(同德推誠佐理功臣 邵城郡開國伯)이란 존호(尊號)를 받았다. 그 후 예종(睿宗)이 죽자 그 태자(太子)를 王으로 옹립하였으니 그 공(功)으로 다시 협모안사공신수태사 중서령소성후(協謨安社功臣守太師 中書令邵城侯)가 되었고 한양공(漢陽公)에 책록되었는가 하면 인종(仁宗) 2年에는 양절익명공신 중서령영문하상서도성사 판이병부 서경유수사 조선국공(亮節翼命功臣 中書令領門下尙書都省事 判吏兵部 西京留守事 朝鮮國公)이 되니 나라 안에서 그의 지체를 누를 사람은 임금 밖에는 없게 되었다.
따라서 李資謙의 위치가 문제가 되었다. 즉, 이렇게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된 이상 일반(一般) 신하(臣下)와는 구별하여 대우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인종은 조정(朝廷)에 조서(詔書)를 내려서 조신(朝臣)의 의견을 타진하게 되었다. 여기에 보문각에서 학사(學士)로 있던 정극영(鄭克永)과 최유(崔濡)등이 각각 의견을 진언(進言)하였다.
“천자(天子)에게도 왕후(王后)의 부모(父母)는 신하(臣下)가 아닙니다. 지금의 이자겸도 또한 태후(太后, 仁宗의 母)의 부친(父親)이며 또 이자겸의 女가 인종비(仁宗妃)이므로 마땅히 백관(百官)과는 달리 대우해야 할 줄로 압니다.”라고 하였는데 조정(朝廷)의 여론은 모두 이 의견에 찬동하였다. 그러나 당시 보문각대제학으로 있던 金富軾만은 이는 군신(君臣)의 명분(名分)에 맞지 않다는 이유를 붙여서 반대하였다. “하늘에는 해가 둘일 수 없는 것과 같이 땅에서도 임금이 둘일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임금의 父라 할지라도 신하(臣下) 이상의 존호(尊號)가 없으며 신하(臣下) 이외의 예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군신(君臣)의 예법(禮法)을 지켜야 하고 사가(私家)에서는 父子의 유친(有親) 함을 온전히 하는 일이 옳은 길이 아니겠습니까. 父子의 관계에서도 이렇게 엄연(嚴然)한 구별(區別)을 지켜야 함이 예부터 내려오는 법일진대 외척(外戚)과의 관계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주장의 이론은 모두 중국(中國)의 옛 제도(制度)와 법도(法度)에 의한 것이었고 그 정연(整然)한 논리에 반대할 사람이 없었다. 이에 입장이 난처한 시중(侍中)은 조정의 의견을 조정할 수 없어서 王에게 두 의견을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王은 역시 결론을 내지 못하고 근신(近臣)인 강후현(康侯顯)으로 하여금 李資謙의 의견을 들어보자고 하였다. 왕의 속마음을 전해들은 李資謙은 이렇게 아뢰었다. “臣이 비록 아는 것은 적으나 이제 金富軾의 의견을 들으니 이것이야 말로 천하(天下)의 공론(公論)입니다. 하마터면 노신(老臣)이 불의(不義)에 빠질 뻔 했습니다. 이에 金富軾의 주장대로 해 주십시오.”라고 분명히 하였다.
여기에서 李資謙은 역시 신하(臣下)의 신분(身分)으로 굳어졌고 金富軾은 그 명성(名聲)이 나라에 떨쳤다. 이 사실에서 金富軾의 합당(合當)한 논리(論理)와 이자겸의 넓은 도량(度量)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金富軾에게 다시 수긍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즉, 인종(仁宗)이 李資謙의 조고(祖考)인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이었던 이자연(李子淵)을 추성좌세 보사공신 개부의 동 삼사수 태사겸 중서령 감수국사 상주국 경원군 개국공(推誠佐世 保社功臣 開府儀 同 三司守 太師兼 中書令 監修國史 上株國 慶源郡 開國公)으로 추봉(追封)하게 되자 어느 시대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로 李資謙의 비위을 맞추어서 출세를 바라던 박승중(朴昇中)이란 사람이 李資謙의 분황일(焚黃日: 家廟에 제사 지내는 날)에 나라의 교방악기를 내려서 이용케 하자고 청한데 대하여 金富軾은 역시 반대하면서 말하되 나라의 종묘(宗廟)에만 쓰는 교방(敎坊)의 악기(樂器)를 내리는 일은 사리(事理)에 맞지 않음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이 일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는데 그 후 박승중(朴昇中)은 또 다시 李資謙의 호의를 사려는 생각에서 李資謙은 그 지위가 특수하니 그 생일(生日)을 인수절(仁壽節)이라 부르자고 제안했다. 이때에도 역시 金富軾은 생일에 절자(節字)를 붙여서 부른 일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에 천추절(千秋節)이라 부른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는 임금의 경우이고 신하로서 절(節)을 붙여서 불렀다는 말은 아직까지 들어본 일이 없다고 반박하였고 그 주장에 평장사(平章事) 김약온(金若溫)도 찬성을 표시하여 이 계획마저 좌절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사례(事例)들은 金富軾의 논리와 이를 수용한 李資謙의 도량(度量)이 당시 고려(高麗)의 국가적 안정(國家的 安定)에 기여(寄與)했으리라 믿어진다. 사실 당시의 상황은 李資謙은 고려 조정과 특수한 관계와 위치에 있었으나 정사(政事)에 있어 사리(事理)와 논리(論理)가 합당(合當)하면 그것을 존중(尊重)하면서 국왕(國王)을 보좌(補佐)한 것이다. 그러면서 또 자기 딸을 인종(仁宗)에게 납비(納妃) 시켰으니 당대의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실권(實權)을 장악한 인물이었는데 이 실세(實勢)에 대하여 대항했다고 하는 것은 여간한 패기(覇氣)와 용기(勇氣)가 없이는 될 수 없는 일이었다.
金富軾과 李資謙은 동시대(同時代)의 사람으로 고려문물(高麗文物)의 전성기에 외침(外侵)을 막고 내치(內治)에 전력하여 국력(國力)의 융성에 선도적(先導的) 역할을 한 인물(人物)들이다.

侍中公派 30世 德 煥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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