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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조선일보-황제가 된 역신 이징옥과 통도사가 있는 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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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7-05-25 12:01 조회3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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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발췌 [박종인의 땅의 역사 - 81. 황제가 된 역신 이징옥과 통도사가 있는 양산]
발행일 : 2017.05.24 / 기획 A24 면

● 어느 여자의 무덤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수자봉 기슭 솔숲에 무덤이 하나 있다. 조선 시대 무덤이다. 564년 전 여덟 살 먹은 아이 하나 업고 이곳 상신마을에 숨어든 여자 무덤이다. 주소는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2-7이다. 비석은 없다.

상석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贈禮曹參議仁川李公諱潤源又諱台燁乳母之墓(증예조참의인천이공휘윤원우휘태엽유모지묘). 죽어서 예조참의 벼슬을 받은 인천 이씨 윤원 혹은 태엽이라는 사람 유모 무덤이라는 뜻이다. 스무 글자나 되지만 그녀 이름은 없다. 그저, 유모(乳母)다.

500년이 흘렀지만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 그저 북쪽 함길도 종성에서 여덟 살짜리 아들과 몰래 온 여자라고 했다. 아들 이름은 태엽이라고 했다.

알 수 없는 어느 날 그녀가 죽었다. 하늘로 떠나는 순간 그녀가 아들에게 이리 말했다. "네 아비 이름은 징(澄)자 옥(玉)자니라. 네 이름은 태엽이 아니라 윤원이니라. 허나 네가 죽을 때까지 아비 이름도 네 이름도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이징옥(李澄玉·1399~1453). 국사 교과서는 말한다. '반란을 일으킨 정치군인'이라고. 그런데 실록 기록은 이렇다. '털어도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은 청렴결백한 직업군인.' 그 강직한 군인 이징옥이 훗날 쿠데타를 일으킨 수양대군에게 맞서 대금(大金) 제국을 건국하고 황제를 자칭하다 죽었다. 강직하되 반역자로 죽은 사내 이징옥, 반역자의 아들을 평생 길러낸 무명씨(無名氏) 여자 이야기다.

● 적멸보궁, 양산 통도사

경상남도 양산에는 통도사가 있다. 서기 646년 자장율사가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셔와 세운 절이다. 자장은 신라 땅 다섯 군데에 절을 지어 사리를 나눠 모셨다. 그중 하나가 통도사다. 진신사리를 모신 절에는 적멸보궁이 있다. 석가모니 현신이 모셔져 있으니, 적멸보궁에는 불상이 없다. 통도사 적멸보궁에는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향한 창문이 있을 뿐. 금강계단 어디에 사리가 숨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통도사 교무국장 진응 스님이 말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사리에 대한 탐욕을 경계하기 위해서."

맞다, 세상이 어디 부처님 마음대로 굴러가는가. 달을 보라면 달을 봐야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사람이 있다. 진신사리에 숨어 있는 진리를 외면하고 사리에 욕심내는 마음을 경계한다는 말이다. 대웅전 옆 비각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통도사에서 금강계단에 난입해 훔쳐간 진신사리를 사명대사가 돌려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진리는 가끔, 물욕에 자리를 내주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네 중생은 그 물욕 없이는 생계도 꾸릴 수 없고 개인 삶의 성장은 물론 사회와 국가 발전을 도모할 수도 없으니 진리를 보는 눈, 진리를 향한 길은 복잡하기 짝이 없다.

● 삼장수(三將帥)

양산 하북면 삼수리는 한자로 '三帥里'다. 장수 셋이 나왔다는 마을이다. 조선 초기에 활약했던 세 장수 이름은 이징석, 징옥, 징규다. 이야기가 많다. 형제가 열세 살, 아홉 살, 여섯 살 적 서당 갔다 오는 길에 도적 50명을 '선빵'으로 눕혀 버렸고, 마을에서 힘을 알아주지 않자 바윗돌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고(그 바위가 생가에 남아 있다), "산 멧돼지를 보고 싶다"는 어머니를 위해 맏형 징석은 활로 쏘아 반쯤 죽은 멧돼지를 잡아왔고 둘째 징옥은 사흘 낮밤을 쫓아다녀 빈사 상태에 빠진 산 멧돼지를 끌고 왔다는 이야기, 집채만 한 바위 뚜껑을 열고 갑옷을 수시로 수납하곤 했다(이 바위 또한 남아 있다)는 이야기 등등.

모두 10대에 무과에 급제해 남과 북으로 오랑캐 퇴치에 공을 세운 실존 인물이다. 그런데 맏형 이징규는 양산 이씨요, 징옥은 인천 이씨요, 막내 징규는 영산 이씨로 모두 본관이 다르니 이 어인 일인가. 일은 1453년 계유정난에서 비롯되었다.

● 계유정난과 삼장수

둘째 이징옥은 청렴결백하였다. 실록에 따르면 이징옥은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 야인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고, 청렴결백하여 백성이나 야인의 물건에 절대로 손대지 않았다.

관직에 오른 뒤 함길도 국경에서 평생을 근무하며 야인 여진족을 상대로 국경 수비를 맡았다. 10리 밖에서 여진족이 이징옥을 보면 두려움과 존경심에 말에서 내렸다고 했다. 명나라 사신이 탐욕을 부리자 그에게 줄 진상품을 훼손시키는 강골도 보였다. 그 강직함과 용맹과 지략을 김종서가 특히 아꼈다.

첫째 이징석 또한 용맹했다. 수양대군이 그를 특히 아꼈다. 수양이 왕위에 오른 뒤 이징석이 죽었을 때, 왕은 '어찌 이 늙은이를 두고 징석을 데려갔는고!' 하고 하늘을 원망했다. 셋째 이징규 또한 수양대군과 함께 명나라를 다녀온 뒤 수양 편에 섰다.

문제는 1453년 10월 계유정난 그날이었다. 세 형제 가운데 징석과 징규가 쿠데타에 가담한 반면, 둘째 징옥은 수양대군 정적 김종서의 측근이었던 것이다. 강직한 징옥이 수양을 지지할 리 만무했다. 친 수양대군파는 함길도 절제사 이징옥을 파면하고 서울 복귀 명을 내렸다. 다른 말이 아니다. 바로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이를 간파한 이징옥은 곧바로 후임으로 온 박호문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었다. 아니, 황제가 되었다.

● 대금(大金) 황제 이징옥

나라 이름은 대금(大金)이라 칭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함길도 종성 땅에서 여진족을 규합해 두만강 건너 오국성에 도읍을 정하고 대륙에 나라를 세워 불량한 수양대군 무리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종성 판관 정종 무리가 이끈 자객들에 의해 온몸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이미 오른쪽 팔이 칼로 떨어져나간 뒤에도 한참을 대적하다 죽었다.

왜 조선 제국이 아니고 대금 제국인가. 중국 사서에 그 답이 있다.

'금나라 시조는 함보(函普)다. 함보는 고려에서 왔다.'(금사·金史) '금의 시조는 함보이고, 나라 이름이 신라 왕성 김씨에서 비롯됐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청나라 사서 '흠정만주원류고') '여진족 지도자는 신라 사람이다.'(송나라 문집 '송막기문') 고려사에도 금나라가 신라에서 비롯됐다는 기록이 있다. 만주원류고는 '신라와 고려 국명이 왕왕 혼돈되게 쓰인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러니까 이징옥은 조카 단종으로부터 '부도덕하게' 왕위를 빼앗은 수양에 대항해 신라를 이은 금나라를 부활하려 한 것이다.

중국 눈치 보며 사대하던 권력자들 앞에서 황제임을 선언한 군인, 이징옥이었다. 하지만 패배한 반역자였다. 이징옥은 시신도 찾지 못했고, 장성한 두 아들도 함께 싸우다 죽었다. 그렇게 사내들이 역사에서 사라졌고, 역사는 그들을 반역자로 기록했다.

수양대군 편에 선 친형제 징석과 징규는 훗날 세조 연간에 큰 공을 세우며 가문을 빛냈다. 훗날 사람들은 말한다. "장남으로서, 멸문지화를 피하고 집안을 이으려면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라고. 신념을 지키려 한 반역자, 가문을 지키려 한 쿠데타 세력.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정쟁 와중에 엇갈린 형제들 악연은 모질고 길었다. 훗날 이징옥 후손들은 본관을 인천으로 바꿔버렸고 막내 징규 후손 또한 다른 이유로 양산에서 영산으로 본을 바꿔버렸다. 성까지 바꿔버린 형제들 후손은 왕조가 사라지고 대한민국 시대인 지난 1979년에야 비로소 화해를 했다.

● 사내들의 흔적, 그리고 유모

그 사내들이 태어난 땅이 양산이다. 땅은 역사를 기억하는 법이어서, 양산에는 이 세 형제 생가터도 남아 있고 형제들 전설이 곳곳에 전한다. 이징석의 무덤도 양산에 있다. 그런데 양산 어디에도 반역자 이징옥의 흔적은 없다. 대신 경주에 있다.

함길도에서 두 아들이 죽고, 막내 윤원이 살아남았다. 여덟 살인 이 아이를 들쳐 업고 양산까지 내려온 사람이 바로 윤원의 유모다. 양산에 있는 큰아버지 이징석의 집을 찾았지만 외면당했다. 역적의 자식을 살려왔으니 당연했다.

그리하여 천리길을 내려온 유모가 다시 북상해 숨어든 곳이 바로 경주 상신마을이다. 그곳에서 유모는 자신을 부린 상전도 죽고 없는 마당에 자기 피붙이도 아닌 윤원을 보살폈다. 역적의 자식, 눈밭에 던져버리면 목숨 부지는 물론 자기도 천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을, 여자는 그 아이를 죽-을-때-까-지 보살폈다.

그 여자가 경주 상신마을 뒷산 기슭에 잠들어 있다. 혼인은 했는지, 자식은 있었는지, 성은,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남의 자식 유모라는 흔적만 무덤 앞 상석에 새겨져 있을 뿐이다.

강직한 직업군인, 황제 이징옥도 위대하였다. 그녀, 유모는 참으로 위대하지 않은가. 가슴이 먹먹하여, 나는 솔숲 무덤 앞에서 한참을 일어날 수 없었다. 무명씨 여자가 물욕 없는, 탐심 없는 진리를 알려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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