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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공(이자연)의 인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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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7-12-04 11:17 조회1,5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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章和公(李子淵)의 人品

 

章和公은 始祖 할아버지의 長孫인데 1003年 태어났으며, 高麗 현종15年 甲子 3月에 進士로서 文科에 壯元及第하였고 中樞院 副使 內史侍郞 平章事와 門下侍中에 이르렀다. 11代 文宗은 또 推誠佐世 保社功臣의 칭호를 내리고 開府儀 同三司 守太師 겸 中書令 監修國史에 上柱國 慶源郡(현 仁川)開國侯로 봉했으며 食邑 3000戶를 내렸다.

以上은 高麗史節要, 동사절요 그리고 우리 족보에 수록된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이와 같은 子淵公에 대한 史書와 그의 官職 등 기록은 이것으로 끝내고, 여기서는 國立 中央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는 墓誌石에 기재되어 있는 글 중 子淵公의 人品에 대하여 알아 보기로 한다.

 

誌石文에 의하면 公은 하늘이 내린 위대한 度量의 人이요 泰山의 精氣가 서려 있으며 特出한 풍모와 영민한 知性 그리고 그 溫和한 人品은 누구든지 敬과 尊을 느끼게 하였다

侍中으로서 20年 政事하는 동안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알고서는 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임금이 말씀하시기를 “어진 우리 侍中이 人物을 두루 찾아 內外에 등용하니 하늘이 돌보아 나라의 根本이 바로 섰다”고 하고 “임금이 나라 걱정을 안 해도 되니 짐은 할 일이 없도다.” 하셨다.

公은 國戚인데다 그 職이 榮貴하나 사람에게 교만하지 않고 작녹이 무거워도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으며 예절지킴에 忠節은 日月같이 밝고 예의는 道理에 맞게 하였다

人間의 命은 하늘에 있다고 하였던가! 큰 별 꼬리를 감추었는지, 病든지 수 일 만에 世上을 떠나니 서기 1061年 8月 30日로 59세였다. 조정과 宮中은 슬픔이 가득하고 거리와 市場은 침묵 속에 休業하고 승려 도사들은 검은 옷을 입고 백성들은 눈물만 흘렸다고 기록되고 있다

조정에서는 임금이 急히 王命을 내려 有司를 보내 宮中禮法에 따라 장례 지내도록 하고 조서하여 守太師 中書令을 증직하고 시호를 章和라 하였다

 公은 운명할 때 마음은 더욱 밝아져서 여유 있게 유언하되 佛家의 禮 대로 다비(화장) 法을 따르도록 하였다.

 公은 王室의 守護뿐 아니라 오랜 기간 善政을 베풀고 백성의 신망이 두터운 보기 드문 侍中이었으며, 또 10여명의 子女 중 재상도 있고 王妃도 있는 尊貴한 身分이지만 自宅도 아닌 妙覺寺 법당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운명하면서 유언한 것을 보면 당시 고려의 불교가 백성에게 얼마나 큰 정신적 지주가 되었는지 짐작할 만 하다

묘지명에 이르되, “아깝도다! 命이란 하늘에 있으므로 사람으로서는 능히 제어할 수 없는가?  황천길 한번 닫히니 永遠히 이별이네, 슬프도다! 하늘에 물을 길 없고 급작스레 꺾긴 일.  마음 아프구나! 언덕이 옮겨지고 골짜기 변해도 誌石만은 보존되겠지. 눈처럼 희고 난초처럼 향기로우니 그 名聲은 영원하리다.” 誌石文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후 文宗 朝庭에 배향되었다

우리는 옛 어른 보지 못했으니 그 人品을 論할 수 없다. 다만 기록을 읽어 그 人品을 상상해 볼 뿐이다

 

<關聯 二題>

一. 우리 仁川李門은 신라 말엽부터 仁川 地方에 世居 하면서 支配階級으로 成長하여 점차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였으므로 신라 下代와 특히, 고려 초 중엽에는 王室과의 통혼이 많아졌고 시조 許謙公과 그의 長孫인 李子淵 (고려 문하시중, 시호 章和公)과 李資謙(중서령 문하시중, 시호 朝鮮國公) 代에는  그 절정을 이루었으며 100여년간 仁川李門이 고려 政權의 핵심적 정치세력 가문으로 등장하였다

이와 같이 成長한 우리 仁川李門은 고려 8代 현종 임금 이후 17代 인종 임금까지 모두 10분의 왕비가 나왔으며 그 왕비들의 소생으로 다섯분의 임금(순종 선종 헌종 숙종 인종)과 11분의 王子와 6분의 公主가 탄생하였다. 또 外孫으로 왕비가 된 분이 3분이고 그분들을 통해서 탄생된 임금이 3분(덕종 정종 인종)이다

시조공이 3世에서 6世까지 4代에 걸쳐 出生한 49명중에서 6분이 佛門에 入門했고 나머지 43명중 재상에 오른 분이 18명이나 되었으니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上將軍과 學行 文章 外交에 탁월한 人物 도 많이 배출되었다

          - 同浩 大宗會長의 글(仁川李氏 시원을 찾아서)에서 -

           

二. 우리 國史學界의 태두인 이병도 박사는 仁川李門에 대하여 그의 저서 國史大觀 205쪽에서, 그 시기는 8代 현종에서 11代 문종, 16代 예종, 17代 인종 때 까지로 이 무렵에 각종 制度의 개혁, 불교 유교의 진흥, 美術공예의 발달, 그리고 빈민구휼과 外交와 文治에도 힘을 써 고려文化의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 30世 德 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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