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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은 仁川李氏 요람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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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6-01 16:50 조회2,0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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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은 仁川李氏 요람의 땅이다

仁川은 경기도 강화만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이 땅은 옛날 미추홀이란 小國이었는데 고구려 때는 매소홀현이 되었다가 신라 경덕왕때 소성(邵城)으로 개칭되었고, 고려(高麗)에 들어와 8代 현종(1018년)때는 수주(樹州), 15대 숙종때는 인예태후(李子淵 女로 文宗妃며 세 임금의 어머니임)의 친정 고을이기 때문에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시켰다. 또 문경태후(李資謙의 女로 예종비며 子는 仁宗임)의 고향인 까닭으로 仁字를 넣어 인주(仁州)로 개칭하였고, 조선조 태종 13년(1413년)에 仁川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仁川이 역사상으로 중요시 된 것은 李朝末부터로 당시는 제물포란 漁村이었지만 위치상 서울의 관문으로 國際的 성격을 띤 항구도시로 발전하여 현재는 世界的 무역항이 되었고, 또 국제항공 교통의 중심이 되었으며 최근에 개통된 仁川大橋는 世界 第 6位의 名物이라니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이러한 인천 땅에 옛날에는 어떤 姓氏의 사람이 살았느냐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仁川市史와 仁川日報(2001.3.28일자)에 게재된 仁川史 재조명이란 제목의 論文에 의하면 仁川은 仁川李氏 요람의 땅임을 지적하고 있다.
나말여초(羅末麗初) 우리나라는 역사상 큰 격동기를 겪었는데 1000년 가까이 번영을 누렸던 신라가 무너지면서 各 地域에는 호족세력이 대두하여 그들은 地域을 넓히고 大土地를 소유할 뿐 아니라 강력한 軍隊를 조직하여 막강한 政治세력으로 成長하여 그들의 中心人物을 성주(城主) 또는 장군(將軍)이라 칭하면서 그 지역을 통치하기도 하였다.
이 時期에 仁川지역의 대표적 호족은 仁川을 본관으로 한 仁川李氏였다. 仁川李氏 일족은 고려 초 중엽 대대로 王室과 중복된 혼인관계를 맺어 家門의 권세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仁川李氏가 처음 王室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허겸(仁川李氏 始祖公)부터이다. 始祖公 이허겸은 그의 딸이 당시 외척으로 權勢家였던 시중 김은부(金殷傅)의 부인이 되어 그가 낳은 딸이 현종(8代)의 왕비가 되었으니 바로 이허겸의 外孫女인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이허겸의 長孫인 侍中 李子淵은 그의 딸이 文宗(11代)妃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인예태후로서 순종(12대), 선종(13대), 숙종(15대)과 대각국사의 어머니이다.
그리고, 이자연의 孫子인 李資謙은 이러한 정치적 배경을 업고 벼슬길에 올라 승승장구 승진하여 마침내 國政의 中心人物이 되어 권력을 행사하면서 그의 딸도 16대 예종비(文敬太后)가 되었고, 그가 낳은 해(楷)를 왕으로 옹립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가 바로 仁宗(17대)인데 인종이 즉위하자 外祖父인 이자겸을 수태사(守太師) 중서령(中書令)의 최고직에 올리고 소성군 개국백(邵城郡 開國伯)에 봉했으며 이때부터 이자겸의 天下가 되었다. 그러나 權力이란 영원한 것이 아니어서 이자겸의 몰락과 함께 仁川李氏 門中도 전성기를 접게 되었다.

仁川李氏는 文宗에서 仁宗 때까지 7代에 걸쳐 90여년간 中央政權을 장악했는데, 5名의 門下侍中, 10名의 王妃, 그리고 수십 名의 재상급(門下侍中 平章事 등)과 判書(참지정사 시랑등)를 배출했는데 그 時期 고려는 대외적으로 女眞과는 정벌과 융화책으로 中原의 宋과는 和解政策으로 國政의 安定을 기하고 文物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仁川李氏 家門이 仁川을 基地 삼아 호족으로 成長한 것은 仁川이란 지역이 西海의 海上交通의 中心地가 됨으로써 海上活動이 활발할 뿐 아니라 멀리 日本, 中國 등과의 무역으로 富를 축적하면서 成長한 호족가문이었기 때문인데, 이와 같은 仁川李氏의 발전모습은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과 비슷하다. 王建도 개성(당시 송도)의 호족으로 해상활동과 무역으로 번영하고 성장한 호족이란 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하겠다.
세보(世譜)에 의하면 李許謙의 아들인 대장군 눌(訥)과 上將軍인 손자 성간(成幹)이 있는데 성간의 부인이 개성(開城)王氏로서 그의 父가 고려태조 왕건 집안으로 나타난다. 왕건은 초창기 국가의 통합과 융화를 위하여 各 地域의 유력한 호족의 딸들과 혼인정책으로 결합을 굳게 하였으며 어떤 호족들에게는 일정한 권한을 부여하는 정책으로 유대를 공고히 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仁川李氏가 王建 집안과 혼인을 맺은 것은 仁川李氏가 강력한 호족세력이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仁川지역에는 仁川李氏 外에 여러 호족이 있었는데 富平 李氏, 仁川 文氏, 공씨(貢氏), 하씨(河氏), 전씨(全氏) 등으로 이들 地方호족들과 제휴 또는 통제하면서 가장 큰 호족으로 政治세력을 갖추면서 成長한 仁川李門으로서는 仁川이야말로 仁川李氏의 땅이요 요람이라 하겠으며 여기에 한가지 더 역사적인 사실을 살펴보면 始祖公(許謙)은 벼슬이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개국후로서 식읍이 1,500호 였는데 곧 仁川이며 長孫 章和公(子淵)은 문하시중으로 보사공신과 중서령 상주국 경원군 개국공을 더하고 식읍 3,000호를 내렸으니 이곳 또한 현 仁川이다. 또 이자겸공 역시 당시 고려의 실권자로서 소성후와 보사공신으로 식읍이 3,300호 였으니 이 또한 仁川 땅이다. 이런 사실 등을 비추어볼 때 우리 仁川李門으로서는 仁川이 예사로운 곳이 아니다. 또 여기에 始祖公 묘소와 源仁齋 등 관련 文化財가 있으니 후손으로서 느끼는 바 감회가 크다.

참고 : 國史大事典, 仁川市史, 仁川史再照明(仁川日報社), 仁川李氏世譜

30世 德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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