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조

 시조(始祖) 이허겸(李許謙)

 

득성조(得姓祖) 이허기(李許奇)께서 소성부(邵城府)=(仁川)의 동쪽 소래산(蘇來山) 아래에 거주했으며 휘(諱=이름) 검(儉)과 파(波)와 귀(貴)와 준(俊)은 대대(代代)로 신라의 대관(大官)이 되어 소성백(邵城伯)을 습봉(襲封)하였고 그로부터 선대(先代)의 어른들께서 인천지방에 세거하면서 토호문신세력(土豪文臣勢力)으로써 복록가문의 영달(榮達)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득성조로부터 10세(世)에 내려와 이허겸공(李許謙公)을 1세조(世祖)로 하여 인천이씨 세보(世譜)릐 본관조(本貫祖)로 삼았으며, 이 분이 뒷날 증.상서좌복야.상주국.소성현.개국후(贈.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에 추증된 시조(始祖)할아버님이며 이때가 1024년(고려 현종15년)이다.

 

이허겸묘(李許謙墓)

 

위  치: 인천광역시 연수구 연수2동 583-1

시  대: 고려초기(약천년이나되었다)

이허겸의 묘소는 연수동에 있는데 예날에는 간치도(看雉島) 또는 묘소의 섬이 바다 한가운데 있어서 물위에 떠 있는 연꽃과 같다하여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주변의 바다를 메구어 아파트가 크게 들어서고 묘 역 주변을 큰 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후손들이 이허겸의 재실인 원인재(源仁齋)를 묘소 옆으로 이건(移建) 증축 하였고 당국에서는 문화재로 지정하였으며 이곳의 인천 지하철 역이름도 원인재 역으로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천 시민들은 이곳을 충,효(忠,孝)의 수신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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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공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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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재

 

高麗贈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李公許謙神道碑銘幷序

 

余嘗謂爲人肇祖創可繼之業樹不拔之基孫麗不億歲垂百古.有若天保而神護者.是孰使之然哉.及乎閱世旣久歷數今古.人未有爲家國自致者.適見其升沈興衰之循環瞬目則.輒瞿然心語曰曷爲其然也嗟夫天長地久.人多如雨點.其來也無謂.其去也無憑.風烟之聚散而已.草樹之腐朽而已.乃若豊功偉烈爲國楨幹조之土而命之氏封其酌而立其宗者.或不能千百之一二以千百一二之人.爲能保有閥閱.傳之屢百代計以鉅萬戶爲餘人所誦慕焉則其心有修之豊積之厚.不期然而然也.歲靑猪之秋仁川李氏大宗會長南浩翁以僉宗議袖譜牒世德等諸文獻而踵余熊津之靑儒堂謁其始祖顯刻之役閱歲餘文未克就不惟不遑所不敢爾.其請不但已.謹受而卒業按舊譜公諱許謙實爲邵城氏一世之祖焉.邵城氏遠昉於駕洛國首露王王立許氏黃玉爲后有子十人比其薨也.王哀戚甚且感后言賜二子以后姓.金之爲許是已.又按家錄有諱奇以首露王之裔.新羅景德王朝官至兵馬使大匡.唐玄宗天寶十四年乙未冬.有祿山亂.翌年二月奉使至蜀.帝嘉甚.贈之以五古一篇而.益致引重眷戀之意.丁酉復從帝還都.賜皇姓李氏封邵城伯.許復爲李而.或稱以李許複姓焉.厥後失系考諸文正公之저所撰皇考文忠公公壽誌文稱邵城伯爲十三代祖文忠之於公爲玄孫則邵城間公九代也家錄以奇儉波貴浚系之公上而書以獨子則.於公五代也壬戌譜及邵城世德幷系以九代與上誌文所載代數不無契合而若其諱與事蹟則有不免杞宋之莫徵矣無寧舊譜不從諸說而斷以公爲一世者.豈亦闕疑謹重之道也歟噫武成經也鄒夫子止云取二三策已.以是銘公則庶免爲杜撰之歸矣公生於羅季事麗朝.歷大官襲封邵城伯後贈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食邑一千五百戶生卒年月及官階履歷不著.藏在仁川文鶴山下看雉島辛坐原.術者謂龜形配經州金氏父工部侍郞.樂浪君殷說祖敬順王墓與公同폄.嗣後大昌.是州之縣而郡.郡而府.未始不由於仁川氏.雖尋常行過.知其爲名墓碩塚而指點焉矜式焉苾芬孝祀勿替引之.寧不休哉長子翰.中樞副使.累贈門下侍中諡文景二子訥大將軍三子진右僕射女適安山金殷傳知中樞戶部尙書中樞使贈上柱國安山郡開國侯長房孫子淵推誠佐世保社功臣門下侍中上柱國慶源郡開國公食邑三千戶配享文宗廟庭子祥尙書右僕射歷事三朝忠義堂堂子若孫幷登台鼎人有作詩賀之者曰庭下芝蘭三宰相門前桃李十公卿次房孫成幹上將軍檢校太子小保三房孫聰顯禮部尙書曾以下歷擧其著顯者而內外椒房.之親.及女壻若而人別爲之採入.古無例也.蓋有非常之人則宜乎史蹟之非常而文不容苟焉而已子淵八男정守太傅進太師門下侍中慶源伯諡貞憲적殿中少監碩兵部侍郞東北面兵馬使工部尙書의門下侍郞平章韶顯家出法名眞應諡惠德王師顥門下侍郞平章事守太傅贈慶源伯諡景德전贈門下侍郞平章事守太傅顔門下侍郞平章事諡襄愼曰預歷事六朝翰林學士政堂文學進中書侍郞平章事諡文顯曰오號金剛居士文德殿太學士判尙書吏部事監修國史門下侍郞平章事諡文良卽子祥二男也曰資仁兵部侍郞右諫議大夫尙書左丞中樞院副使曰資義中樞院使宣宗朝奉使如宋有聲譽曰資玄號息菴友號希夷諡眞樂登第爲大樂署丞棄官入淸平山蔬食布衣樂道終身.退溪先生詩以序之극稱其淸修苦節曰資德諡莊懿中書侍郞平章事曰資謙門下侍中中書令朝鮮國公曰資諒守司空中書侍郞平章事曰公壽字元老諡文忠天資宏厚兒時外祖崔文和公惟善撫其頂曰此兒當爲大器.及長力學登第推忠衛社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門下侍中上柱國曰彦林工部尙書右僕射曰軾金紫光祿大夫尙書左僕射參知政事判尙書戶部事曰之저卽文正公政堂文學守司空左僕射判西京留守事有直節能文章嘗侍從.西都有詩膾炙人口至朝鮮世祖朝採入樂府曰之茂門下侍郞平章事曰光縉中書侍郞平章事諡貞懿曰仁老號雙明齋文章鳴世.明宗朝擢魁科以書狀官如宋謁考亭夫子得聞爲學之要所著有銀臺雙明破閑三集行于世曰藏用政堂文學中書侍郞平章事太子太傅門下侍中諡文眞文章絶倫一時大作多出其手元宗甲子從王如元時元要我援軍緊迫不已.公敏於專對.事竟得解元帝親賜宴至再曰作臣官門下侍中痛斥妖僧.被貶黜曰.온號永慕齋中顯大夫典醫監與鄭圃隱李石灘李遁村諸賢相善性純孝有米櫃之感事聞國王遣按廉使竪雙碑以褒之曰元紘登第有詩聲政堂文學麗革以節流于仁川有喜晴及.新亭詩載在權陽村集其子약監正太祖龍飛守罔僕義灌文科太宗朝京畿咸鏡兩道監司陞資憲吏曹判書曰賢佐大匡輔國崇祿大夫慶城府院君曰文和號烏川斥佛崇儒左參贊議政府事兼藝文館大提學贈領議政諡恭度有六男位幷卿宰曰若稽古坤殿曰元成太后曰元惠太后曰元平王妃卽金殷傅之三女而於公獅孫也曰仁睿太后 仁敬仁節兩王妃子淵之女而間公三代也曰元信王后정之女曰思肅太后碩之女曰長慶王妃顥之女曰貞信王妃預支女而其女爲敬和王妃者間公四五代也曰文敬太后延德王妃福昌王妃資謙之三女而間五代也曰恭讓世子嬪元紘之女而間十二代也至漢朝坡平尹번女爲貞熹王后寔恭度之外孫而間十五代也東床之達而爲人始祖與中顯祖者則曰尹瓘籍坡平門下侍中判尙書鈴平縣開國伯諡文肅成幹之壻也曰金義元籍光山檢校太子太師戶部尙書兼三司使特進金紫光祿大夫諡忠貞碩之壻也曰南平文公元平章事諡貞敬의之壻也曰江陵金仁存檢校太師門下侍中諡文成顥之壻也若夫源遠而派益分代久而孫愈繁則餘他科宦簪笏忠孝德學之蔚有聲望者多不能盡記嗚呼.詩不云乎維嶽降神生甫及申麗興之初公내應運挺生巍勳嘉謨裕乎己而傳諸後.世臣林立而.食列鼎.賢媛輩出而.母萬民.儼乎爲宗廟之主석.社稷之源府實東方有史之所未曾有也.의亦盛矣曾於수政時公墓近爲農郊.至光復後自政府區劃城市.陵谷之變.朝不慮夕.우其滄桑之貿遷有如是矣내者.諸苗裔同心協謀.旣認許當局而淨化塋域.又復醵出巨자無遠或忽無人或漏而.齋舍凉욱增制移建.旣落之.治豊珉以侈墓噫如今板蕩.滔滔是遺親忘本.此豈易究而易圖者哉將見仁川氏之興未艾而.向所稱孫麗不億傳之屢百代者.幸余言之靡錯也是宜銘銘曰

 

仁川之李出自首露.孰配至尊黃玉許后后感王衷.二子從許.阿殖諱奇.奉使天寶奔命于蜀.祿山可討.錫之皇姓.帝衷是誘.杞宋莫徵.發歎宣父公生麗興寔天啓佑封之邵城錫之民戶公爲一世昭昭舊譜.子姓內外高步雲路貂蟬滿堂孰非公輔.賢媛鍾毓十數國母.의公厚蔭.以庇以燾.有완佳城遵彼鹹鹵.百世在前萬代在後.長發其祥受天之祜.我書于石其辭不誣

 

歲舍丙子流火節         月城 李鍾洛 撰

 

해 설

 

고려증상서좌복야상주국소성현개국후이공허겸신도비명병서

 

나는 일찍이 말하기를 「한 씨족의 始祖가 되어 이어갈 수 있는 偉業을 創造하고 확고한 터전을 수립하여 불억(不億:많은 수효를 말함)의 後孫으로 悠久한 歲月에 걸쳐 하늘과 신의 保護를 받은 것과 같기에는 그 누가 시켜서 그러한 것인가」라고 했다. 급기야는 많은 世故를 겪으면서 古今의 사람들을 가늠해 보니 거의가 家庭이나 國家를 위하여 자기의 할 수 있는 힘을 다하는 자가 없음으로서 덧없는 興亡盛衰가 瞬息間의 循環反覆을 보게 되었다. 나는 두려운 듯이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나?」

 

아! 天地는 유구하다 빗방울처럼 많은 사람들은 意義없이 왔다가 根據없이 가게되니 風烟과 같이 모였다 흩어지고 草樹와 같이 썪어 없어질 뿐이다. 그러한 와중에서 풍성하고도 偉大한 勳業으로서 國家의 틀이 되어 임금이 土地와 성씨를 내려주며 爵을 封하고 宗을 세울 정도인 사람은 아마도 千,百명 가운데서 하나 둘도 채 못될 것이다. 천 백분의 一, 二 밖에 안되는 소수만의 사람으로서 훌륭한 門閥을 保有하여 누백대에 전해지고 몇萬戶로 헤아려서 餘地사람들의 欽慕대상이 되기에는 반드시 豊富한 修養과 累積된 德望의 土臺에서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된 것이다.

 

乙亥年 가을에 仁川李氏大宗會南浩氏가 僉宗의 決議에 따라 譜牒과 邵域世德등  모든 文獻을 가지고 公州의 靑儒堂으로 나를 찾아와 始祖의 신도비문을 要請했다. 一年이 지나 도록 글이 이뤄지지 못했으니 겨를을 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황송하여 감히 그렇겠노라고 선듯 나설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끊임없는 要請에 삼가 붓을 들게 되었다. 舊譜를 살피건대 公의 諱는 許謙이니 실로 인천이씨의 一世祖가 된다. 인천이씨는 駕洛國 首露王에서 비롯되었는데 王이 許氏 諱 黃玉으로 王后를 삼아 十兄弟의 아들을 두었더니 돌아감에 미처 王은 심히 哀悼하고 또한 后의 말씀에 感動하여 두 아들에게 모성을 따르게   하니 金氏로서 許氏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家錄을 살피건대 諱 奇는 首露王의 後孫으로서 新羅 景德王 때 벼슬은 兵馬使大匡에 이르렀고 唐나라 玄宗 天寶十四年乙未年 겨울에 安祿山의 난리가 일어남에 이듬해 二月에 使臣의 명을 받들고 巴蜀에 이르니 唐帝는 勞苦를 가상하게 생각하여 五言古詩一篇을 기증하여 引重과 眷戀의  뜻을 전하고 다음해 丁酉年에 唐帝를 따라 還都하자 皇帝의 姓 李氏를 내려주고 邵城伯을 封하니 許氏에서 다시 李氏가 되었으며 혹은 李 許 複姓으로 일컬어 지기도 했으나 그후 失系하였다. 文正公 諱 之저께서 撰述한 아버지 文忠公 公壽의 誌文을 참고로 한다면 邵城伯 諱 奇를 十三代祖라 稱하였으니 文忠公은 公에게 玄孫이 되며 邵城伯은 공에게 九代祖가 된다. 家錄에는 奇, 儉, 波, 貴, 浚으로서 公以上의 계대를 대고 五代 모두가 獨子로 되었으며 그대로라면 邵城伯은 公에게 五代祖가 된다. 壬戌譜 및 邵城世德에는 모두 邵城伯과의 九代로 記錄되었으니 위 誌文의 所載와 代數는 一致가 되나 諱字나 事實에 대하여는 기송(杞宋 : 문헌의 증거가 없는 것을 말함)을 證據할 수 없으니 차라리 舊譜에선 다른 記錄과 달리 공을 一世로 斷定한 것이며 역시 의문되는 것을 제쳐놓고 愼重

을 기하는 道理인가보다.

 

아! 무성(武成 : 書經의 篇名)은 聖經임에도 孟子께선 그 중에서 「몇몇 부분만을 取得한다 라고」말씀하셨으니 이러한 의미에서 공의 신도비명을 가늠한다면 거의 두찬(杜撰 : 典據가 확실치 못한 저술)이라는 結果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은 新羅末에 誕生하여 高麗朝에서 벼슬을 하여 大官을 지내고 邵城伯에 襲封되고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의 벼슬에 贈職되고 食邑 一千五百戶를 下賜받았다. 生年月日과 官階履歷은 記錄이 없고 墓는 仁川 文鶴山 아래 看雉島 辛坐의 자리에 있으니 風水家에선 거북의 形이라고 말한다. 配는 慶州金氏니 아버지는 工部侍郞 樂浪君 殷說이요 할아버지는 敬順王이며 墓는 公과 合폄이다.

 

그후 後孫들이 크게 繁昌하여 본 고을이 縣에서 郡. 郡에서 府로 昇格되기까지는 모두가 仁川李氏와의 關係가 없지 않으며 비록 보통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이 墓가 名墓임을  알 게 되어 지점(指點 : 손가락으로 가리킴)과 긍식(矜式 : 공경하여 표본으로 삼음)을 가하고 祭祀가 지금까지 이어지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長子 翰은 中樞副使累贈門下侍中 諡文景이요. 二子 訥은 大將軍이요. 三子 진은 右僕射요.

 

女는 安山 金殷傅에게 出嫁하니 知中樞 戶部尙書 中樞使로 문하시중 상주국 安山郡 開國侯에 증직되었다. 長房孫 子淵은 推誠佐世保社功臣 門下侍中 상주국 慶源府 開國公이며 食邑 三千戶를 下賜하고 文宗廟庭에 配享되었다. 다음 子祥은 尙書右僕射로 歷事三朝하여 忠義가 堂堂하고 아들 손자 모두가 宰相의 자리에 오르니 어느 사람은 詩를 지어 祝賀하기를 「뜰아래 芝蘭은 세 宰相이요. 문앞에 桃李는 열 公卿이라」하였다.  (芝蘭과 桃李는 子孫 또는 兄弟를 가리킴)  二房孫 成幹은 上將軍 檢校太子小保요. 三房孫 聰顯은 禮部尙書이다.

 

曾孫이하부터는 가장 顯達한 분만을 列擧하고 內外 遠近孫에서 王妃의 至親 및 女壻 몇몇 분을 별도로 採用하니 古例에 없다.

 

子淵의 八男에 정은 守太傅進太師侍中慶源伯諡貞憲이며 유은 殿中少監이요. 碩은 兵部侍郞東北面兵馬使工部尙書요 의는 문하시랑평장사요 韶顯은 집을 떠나 佛門에 들어가니 法名은 眞應이요 諡는 惠德王師이다. 顥는 문하시랑평장사 수태부 경원백이며 諡는 景德이다. 전은 贈門下侍郞平章事 守太傅요 顔은 문하시랑평장사이며 諡는 襄愼이다. 預는 歷事六朝하여 翰林學士 政堂文學 進中書侍郞平章事이며 諡는 文顯이다. 오는 號 金剛居士이며 文德殿太學士 判尙書吏部事 監修國史 문하시랑평장사요 諡는 文良이니 곧 子祥의 二男이다. 資仁은 兵部侍郞 右諫議大夫 尙書左丞 中樞院副使요 資義는 중추원사이며 宣宗朝때 宋나라에 使臣으로 가서 남다른 名聲과 稱譽가 있었다. 資玄은 號 息菴 또는 希夷諡 眞樂이니 科擧에 及第하여 大樂署丞이 되었다가 벼슬을 버리고 淸平山에 들어가서 菜食과 布衣로 道를 즐거워 하면서 平生을 마치니 退溪先生은 詩에다 序文을 곁드려 그의

 

淸修苦節을 特別히 稱述했다. 資德은 중서시랑평장사이며 諡는 莊懿이다. 資謙은 門下侍中 中書令 朝鮮國公이요 資諒은 守司空 중서시랑평장사요 公壽의 字는 元老요 諡는 文忠이며 天稟이 宏厚하니 아이 때 外祖 崔文和公 惟善은 그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마땅히 큰 그릇이 될 것이라」하더니 成長하자 學問에 힘쓰고 大科에 及第하여 推忠衛社 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문하시중 상주국이요 彦林은 공부상서 우복야요 軾은 金紫光祿大夫 상서좌복야 參知政事 判尙書戶部事요 之저는 즉 文正公이니 정당문학수사공 좌복야 判西京留守事이며 直節이 있고 文章에 能하여 일찍이 임금을 모시고 서도(西都 : 平壤)에 갔다가 詩를 지어 한 세상에 알려졌더니 조 世祖朝에 이르러 樂府에 採入되었다.

 

之茂는 문하시랑평장사요 光縉은 중서시랑평장사요 諡는 貞懿이다. 仁老는 號 雙明齋이니 文章으로 세상에 울렸고 明宗朝에 壯元及第하여 書狀官의 職責으로서 宋나라에 갔다가 朱子를 뵙고 學問의 要領을 배우니 著述에는 銀臺, 雙明, 破閒등 세 文集이 刊行되어 퍼졌다.

 

藏用은 정당문학 중서시랑평장사 태자태부 문하시중이요 諡는 文眞이니 文章이 普通에 뛰어나서 한 時代의 큰 글이 그 수중에서 많이 나왔다. 元宗 甲子年에 王을 따라 元나라에 가니 이때 元나라에선 高麗에게 救援兵을 要請했다. 끊임없는 긴박한 상황에도 公는 전대(專對 : 외국에 사신으로 가서 황제와 독단적으로 응답함)에 敏捷하므로 事態는 마침내 풀렸고 元帝는 친히 두차례의 宴會를 베풀었다. 作臣은 문하시중이니 妖僧을 痛斥하다가 貶黜을 당했다. 온은 號 永慕齋요 벼슬은 중현대부 典醫監이니 鄭圃隱 李石灘 李遁村 諸賢과 더불어 서로 親善하고 性品이 純孝하여 쌀궤의 感應이 있으니 사실이 알려지자 國王은 按廉使를 보내어 두 碑石을 세워 표창했다. 元紘은 科擧에 及第하고 詩를 잘 지었으며 정당문학을 歷任했다. 고려가 滅亡하자 忠節로서 仁川에 流配되어 유명한 喜晴 및 新亭이라는 題目의 詩를 지으니 權陽村의 文集에 실려 있다. 그의 두 아들에 약은 監正이니 李太祖가 革命을 하자 臣僕이 아니되겠다는 義理를 지켰으며 灌은 문과에 급제하여 太宗朝에 京畿,

 

咸鏡 兩道 監司를 역임하고 資憲 吏曹判書에 승진되었다. 賢佐는 대광보국 숭록대부 慶城府院君이요 文和는 號 烏川이니 斥佛崇儒하고 左參贊 議政府事兼藝文館大提學을 歷任했으며 領議政에 贈職되고 諡는 恭度이며 六男을 낳으니 모두가 卿宰相의 자리에 올랐다.

 

歷代의 王妃를 열거한다면 元成太后, 元惠太后, 元平王妃는 곧 金殷傅의 세 따님이며 公에게 外孫이 된다.  仁睿太后 및 仁敬, 仁節 두 왕비는 子淵의 따님이며 공에게 四世가 된다.

 

元信王后는 정의 따님이요 思肅太后는 碩의 따님이요 長慶王妃는 顥의 따님이요 貞信王妃는 預의 따님이며 그의 따님이 敬和王妃가 되었으니 공에게 五六世가 된다. 文敬太后,  延德王妃, 福昌王妃는 資謙의 세 따님이며 공에게 六世가 되고 恭讓世子嬪은 元紘의 따님이며 공에게 十三世가 된다. 朝鮮朝에 이르러 坡平 尹번의 따님이 貞熹王后가 되었으니 公度公의 外孫이며 공에게 十六世가 된다. 동상(東床 : 사위의 별칭)으로서 顯達하여 始祖 또는 中顯祖가 된 분을 열거한다면 坡平 尹瓘은 문하시중 판상서 鈴平縣 開國伯이요 諡는 文肅이니 成幹의 사위요 光山 金義元은 檢校太子太師 戶部尙書兼三司使 特進 金紫光祿大夫이며 諡는 忠貞이니 碩의 사위요 南平 文公元은 평장사요 諡는 貞敬이니 의의 사위요 江凌 金仁存은 검교태사 문하시중이여 諡는 文成이니 顥의 사위이다. 그밖에 세대가 멀어지고

 

分派子孫이 더욱 번창함에 따라 科擧, 仕宦, 忠孝, 德學으로서 훌륭한 名望이 있는 분들도 다 기록지 못한다.

 

아! 詩經에 이르지 않았던가. 「山嶽이 神을 내려 甫와 申을(甫 : 甫侯. 申 : 申伯. 周宣王의 賢臣.)  낳았다」라고 하였다. 고려가 興旺하던 초기에 공이 運에 맞게 빼어나서 偉大한 勳業과 훌륭한 計劃을 자신에 여유있게 간직하고 후손에게 전수하여 숲의 나무처럼 늘어선  세신(世臣 : 대대로 한 王을 섬긴 공로가 있는 신하)은 경제상의 國祿을 받게 되고 연달아 나온 賢淑한 女人은 萬民의 國母가 되어 어엿이 宗廟의 神主가 되고 社稷의 本府가 되었으니 실로 東方의 역사에서 없었던 일이라 하겠다. 아! 거룩하도다.

 

일찍기 倭政때에 山所의 附近이 農土로 造成되었고 光復後 政府計劃으로 都市가 됨에 능곡지변(陵谷之變 : 산소 보존의 위태로움)이 朝夕에 달렸더니 滄桑의 變遷에도 산소가 오늘날과 같이 保存되었다.

 

이제 그의 후손들이 同心協謀하여 當局의 認許를 받아 墓域을 淨化하고 또다시 巨金을 醵出하는데 먼 始祖라서 소홀함이 없고 많은 자손들 누락된 사람이 없게 하며 재실의 몸채와 행랑채 모든 부속건물을 增築移建하고 落成式을 하자 큰 碑石으로 墓를 華麗하게 장식하니 아! 이제와 같은 混亂한 세상 물흐르듯 걷잡을 수 없음에 어버이를 버리고 先祖를 忘却하게 되었구나! 이처럼 거룩하고도 훌륭한 일 어찌 쉽사리 圖謀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仁川氏 장래의 運興을 볼 수 있으며 위에서 열거한 수없이 많은 후손으로 屢百代에 전해 진다는 나의 말이 착오가 아니었음을 새삼스레 다행으로 여겨진다. 이로서 銘에 가늠하니 銘에 이르되

 

인천이씨는 首路王에서 나왔어라.  그 누가 임금의 배우자였나!  휘 黃玉이신 허씨 왕후로세. 왕후께선 王의 마음 감동시키니, 두 아들 母姓따라 허씨 되었군. 阿손벼슬을 한 諱 奇는 당나라 天寶년에 사신으로 가서 巴蜀에서 皇帝를 뵈오니 安祿山을 토벌키 위해서였지.

 

皇姓의 李氏을 사성하니 황제의 마음 역시 勸誘되었나봐. 공이 탄생하자 고려가 흥왕하였으니 이 모두 하늘이 도와주신거야. 邵城縣에 봉하고 食邑의 民戶를 하사하였지. 공이 一世祖가 된 사실 舊譜에 환하게 나타났도다. 內外 후손들 환로에 높이 뛰니 堂에 꽉찬 초선(貂蟬 : 담비의 꼬리와 매미의 날개. 高官의 冠의 장식) 그 누가 공보(公輔 : 三公四輔.  즉 임금을 보필하는 大官)의 적임 아니런가.  빼어난 賢媛 十數名의 국모로다. 아! 공의 음덕이 감쌋기 때문이겠지. 樹木 우거진 가성(佳城 : 분묘의 이칭) 저 해변가에 위치하였네. 기왕의 百世와 미래의 萬代에 무궁한 發祥으로 하늘이 주신 복 받으리로다. 내가 쓴 碑文 그내용 거짓 아니로세.

 

歲丙子 流火節          月城  李鍾洛 撰

 

참고: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시조인 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의 후예로 전하며, 수로왕의 장자(長子) 계통은 김해김씨(金海金氏)이고, 차자(次子)는 어머니 허태후(許太后)의 성을 이어받아 허씨가 되었는데, 인천이씨(仁川李氏)는 허씨에서 갈리었다.

후에 인천 이씨, 허씨, 김해 김씨는 같은 혈족이라 종친회명을 '가락중앙종친회'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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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공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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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공신도비

 

 

 왕비(王妃)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4세)(文宗妃) 순종(順宗) 선종(宣宗) 숙종(肅宗) 탄생

인경현비(仁敬賢妃)(4세)(文宗妃) 인절현비(仁節賢妃)(4세)(文宗妃)

장경주(長慶宮主)(5세)(順宗妃) 정신현비(貞信賢妃)(5세)(宣宗妃)

사숙태후(思肅太后)(5세)(宣宗妃)헌종(獻宗) 탄생

원신궁주(元信宮主)(5세)(宣宗妃)

문경태후(文敬太后)(6세)(睿宗妃)인조(仁宗) 탄생

연덕궁주(延德宮主)(6세)(仁宗妃)복창원주(福昌院主)(6세)(仁宗妃)

 

또한, 외손으로서 왕비에 오른 분이 현종 왕비인 원성태후 김씨(元城太后 金氏), 원혜태후 김씨(元惠太后 金氏), 원평왕후 김씨(元平王后 金氏)와 그 분들을 통해서 탄생하신 덕종(德宗), 정종(靖宗), 문종(文宗) 임금님, 그리고 열 한 분의 왕자, 공주이면서 왕후가 되신 인평왕후(仁平王后), 효사태후(孝思太后)를 포함하여 네분의 공주와 예종(睿宗) 왕비인 경화왕후(敬和王后), 선종(宣宗) 왕비인 문정왕후 왕씨(文貞王后 王氏)를 모두 치면 1009년부터 1146년 사이에는 인천이씨 일문과 연관을 갖지 않은 왕은 없었다. 즉, 열 분의 임금님은 모두 인천 이씨 또는 인천 이씨 외손의 소생이었거나, 인천 이씨를 왕비로 맞이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인천 이씨가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면서 모두 벼슬길에 나서 일찍 세상을 떴거나 불문에 들어간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높은 벼슬에 올라 3세에서 6세까지 4대에 출생한 49명 중에서 6명이 불가에 들어가고 나머지 43명중 재상(조선조의 정승)에 오른 이들이 18명이나 되어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장손 이자연(李子淵)은 뛰어난 인품과 탁월한 능력으로 네왕을 섬기며 조정을 이끌었으며 문물제도 정비와 왕실의 안정에도 역할을 담당하여 추성좌세보사공신 문하시중 개부의 동삼사 수태사 감수국사 상주국 경원군 개국공(推誠佐世保社功臣 門下侍中 開府儀 同三司 守太師 監修國史 上柱國 慶源郡 開國公)에 올라 식읍 삼천호(食邑 三千戶)를 받았고 사후에 중서령(中書令)에 장화(章和)의 시호(謚)를 받았는데 장화공이야말로 인천이문(仁川李門)이 고려벌족(高麗閥族)중 가장 세를 떨친 벌족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나머지 손자에 이자상(李子祥)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이성간(李成幹)은 상장군 태자소보(上將軍 太子小保) 이다.

3세부터 6세까지 재상(宰相)에 오른 이들은

정1품 중서령(中書令) 이자연(3세), 이자겸(李資謙)(5세)

정2품 문하시주 이정(4세), 이공수(李公壽)(5세)

종2품 평장사(平章事)

이의(4세), 이호(李顥)(4세), 이전(4세). 이안(李顔)(4세)

이예(李預)(4세), 이오(4세), 이자덕(李資德)(5세)

이자량(李資諒)(5세), 이지무(李之茂)(6세), 이광진(李光縉)(6세)

좌우복야(左右僕射)

이자상(李子祥)(3세), 이언림(李彦林)(5세), 이식(李軾)(6세)

이지저(6세) 등이다.

 

그리고 학행, 문장, 외교로 인천이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예종(睿宗)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대악서승(大樂署丞)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춘천의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소식포의(蔬食布衣) 하면서 선학(禪學)의 연구로 평생을 마친 청평거사(淸平居士) 진락공 이자현(眞樂公 李資玄)이 있으니 예종의 간곡한 부름에도 강(임진강)을 건너지 않았고 세속의 영화에 초연하였다. 후에 조선의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은 그의 고절(高節)을 찬양하였다.

 

쌍명재 이인로(雙明齋 李仁老)는 문장으로 나라 안팎에서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주자(朱子)를 뵙고 학문의 요령을 배웠으며 은대(銀臺), 쌍명(雙明), 파한(破閑) 등 문집 셋을 남겼다.

 

문진공 이장용(文眞公 李藏用)은 고종(高宗)과 원종(元宗)을 섬겨 정당문학 중서시랑 평장사 태자태부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는데 문장이 뛰어나 한 시대의 큰글이 그의 수중에서 많이 나왔다. 몽고와의 승산 없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왕과 권신들의 주저와 반대에도 불구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원종(元宗)의 원나라 행을 성사시켰으며 자신이 임금을 모시고 원나라에 들어가 황제와 독대하여 정정당당하고 의연하게 고려의 입장을 밝혀 당시 전쟁종식의 장애가 되었던 출육(임금의 거처를 강화섬에서 개성으로 옮기는 것) 문제를 해결하였고 또한 원이 고려에 요구한 군사/물자증발을 완화시켜 40여년 전쟁으로 극도로 궁핍한 백성들의 군량미 조달과 병역부담을 덜어주었는데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한 백성들에게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젊은이는 전쟁에서 희생되고 노약자와 부녀자, 어린아이들만 남아있어 농사도 이들이 담당하는 참담한 실정이었기 때문에 만일 그 이상의 가혹한 군량미 수거나 군사동원이 있었다면 백성들을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처참한 실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공이 보여준 높은 애국심, 깊은 학문 그리고 고매한 인격은 마침내 원의 황제(세조)와 대신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하여 원의 황제는 두 차례나 공을 위하여 연회를 열어주었다.

 

연산군 원굉(連山君 元紘)은 시에 능하였으며 정당 문학을 지냈다. 그의 따님이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의 세자빈(世子嬪)이 되었는데 고려가 멸망하자 충절을 지켰으며 억지로 벼슬을 주었으나 신왕조에 협조하지 않았다.

 

공도공 이문화(恭度公 李文和)는 우왕때 장원급제하여 고려에 벼슬하였는데 이태조의 혁명후 불려나와 도승지 대사헌 이조 예조 형조 판서와 의정부 좌참찬과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6남이 모두 경재상(卿宰相)의 자리를 올랐다.

 

 

 여서(女壻)

 

이씨의 사위로서 현달하여 중시조가 된 분으로는 제일 먼저 이성간(李成幹)의 사위인 파평 윤관(坡平 尹瓘)을 들 수 있는데 공은 문무를 겸비하여 여진을 쳐 물리치고 육진을 개척하였고 문하시중, 판상서(判尙書)를 역임하고 영평현 개국백(鈴平縣 開國伯)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공의 아들 대복소경(大僕小卿) 언민(彦旼), 중손 상서(尙書) 종악, 현손 녹사(錄事) 부원(復元) 등도 이씨의 사위가 되었다.

 

광산인(光山人) 김약온(金若溫)은 이정의 사위로 문하시중을 지냈고 시호가 사정(思靖)이며 그의 아우인 김의원(金義元)은 이석(李碩)의 사위인데 검교태자대사호부상서겸삼사사 특진 금자광록대부 중서시랑평장사(檢校太子太師戶部尙書兼三司使 特進 金紫光祿大夫 中書侍郞平章事)의 벼슬에 충정(忠貞)의 시호를 받았는데 오늘날 광산김씨(光山金氏)는 모두 이들의 후손이다. 충정의 아들인 광중(光中) 또한 이식(李軾)의 사위였다.

 

강릉 김인존(江陵 金仁存)은 이호(李顥)의 사위인데 검교태사 문하시중을 지냈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그의 큰아들 김영석(金永錫) 또한 이공수(李公壽)의 사위로 중서시랑 평장사에 올랐는데 강릉 김씨의 대부분이 이들의 후손이다.

 

남평 문공원(南平 文公元)은 평장사로 시호가 정경(貞敬)인데 이의의 사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