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도공파

 

시중공파

공도공파

쌍명재공파

충강공파


공도공(公度公) 이문화(李文和)

 

선생의 자는 백중(伯中)이요 호는 오천(烏川)이며 1358년(고려 공민왕 7년)에 출생하니 천품이 온화하고 어릴 때 이미 대인(大人)의 기상이 이었다.

율정(栗亭) 윤택(尹澤)에게 수학(受學)하였고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의 문하(門下)에 왕래하면서 권근(權近),이숭인(李崇仁),김자술(金自粹) 등과 교유(交遊)하여 문장과 경학(經學)이 세상의 추앙하는 바 되었다.

1380년(禑王 6년)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조선조에 출사(出仕)하여 경기도 안염사(按廉使)가 되었으며 예조판서(禮曹判書)를 거쳐 벼슬이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르렀다.

1414년(太宗 14년)에 향년 57세로 서거하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면서 3일간 조회(朝會)마저 중지하고 영의정(領議政)의 증직(贈職)과 공도(恭度)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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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재전경

 

묘소(墓所)는 경기도 광주 경동이였으나 광복후 서울시에 편입됨에 따라 도시개발에 밀려 1971년 신해(辛亥)년에 유산(遺産)으로 천안시 구성동 구곡등 건좌(乾坐)에 이장 함과 동시에 오천재(烏川齋)를 이곳으로 이건 및 확장 하여 길이 유지하고 있고 서울 덕수궁 옆 건물을 구입, 선생의 호를 따라 오천회관(烏川會館)으로 이름짖고 후손들이 이곳에서 종사(宗祀)를 논의하고 있다.

장흥 금계사(金溪祠), 대구 숭덕사(崇德祠) 함안 도천사(道川祠)에 향사(享祀)되었다.

 

 

參贊議政府事贈令議政恭度李公文和神道碑銘幷序

 

월昔太祖革麗.通才偉器.嬪聯布列礬龍附鳳.造基業於草昧.垂統저於磐泰.時則有若烏川先生恭度李公.以潛龍之舊.拔擢重用.歷事三朝.內而巖廊館閣.外而畿嶺兩湖諸藩鎭.靡不歷任.敦儒術.排佛事.蔚爲五百年文治之權輿.於戱盛矣.李出仁川.遠有代序.其初也.以駕洛王子.宗母姓爲許.至諱奇.祿山亂.使唐有績.帝嘉之.封邵城伯.賜姓李.實爲氏之肇祖.厥後失系.而稱之以李許複姓.一世許謙.使高麗.追贈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候.是生翰.尙書左僕射.諡文景是生子祥.尙書右僕射.是生預.平章事.諡文顯.是生公壽.門下侍中.諡文忠.是生之저.平章事.諡文正.是生世興.翰林院大提學.是生文淵.禮賓同正.是生核保.尙衣直長.於公五代以上也.曰良온署丞迪元.諸陵署直泌.中書舍人益歲.典工判書深.寔公高曾祖이也.비安東權氏.公生於恭愍戊戌.諱文和.字伯中.烏川其別稱也.天資秀異.器度凝重.自兒時.已有大人氣像.及就學.藝業日進.文識淵博.以禮律身.篤於孝友.在夫母之側.怡愉終日.先意承順.前後兩.廬墓六年.少從栗亭尹公學.間嘗從游牧圃兩賢之門.一時名勝.如李陶殷.權陽村.金桑村.卞春亭諸公.是其講磨交好也.禑王庚申.公年二十三.以進士擢魁科一等.同公者凡三人.牧隱.贈之以壯元詩.又作伯中字說.勸讀中庸而深致意焉.此可以기公矣.拜右正言.右獻納.藝文應敎.公登朝.見君臣夜宴.拍手爲樂.歎曰此豈士子食祿之時耶.遂絶意進取.壬申.太祖龍飛.是年九月.分遣諸按廉使.公以左諫議大夫.補京畿左道.上敎曰予以否德.因臣民推戴勉登大位.夙夜惟寅.凡所以勵精圖治者.尙賴中外攸司.신京畿.密邇王室.宣布德澤.宜先四方.其有便民事條.從宜擧行.弼予維新之治.甲戌.改判校書監事.時昌平縣令愼原節.率軍官.斬倭七級.擒一名.公承命.賜宮온綺絹.乙亥正月.復爲諫官.時朝廷.以檢校侍中.濫授國老.公上疏諫.略曰名器.人主所以待賢賞功.不可不重.況侍中之稱.乃총宰之職.雖檢校.不可輕以與人.混雜名位也.臣等竊見卽位以來.不論功罪德行之有無.但以老모輒첩授.數至八九.名器.之濫.莫玆若也.乞將檢校侍中.一皆革去.上不聽.物議惜之.丁丑五月.拜左承旨.上遣宣差權專.徵公于甫州喪次.論捕獲倭人事.九月.入侍講洪範.時.上依麗朝忠肅王之例.欲以居士標號.致書于奉化伯.問公可否.公對以潛邸時軒號.上윤之.遂號松軒居士.戊寅二月.陞都承旨上辛檜巖寺.見王師自超.次于楓川.特下召命.蓋於是時.淮陽.金化.金城等州郡.因東北面.穆.翼.度.桓.四時大享.使臣往來.多民弊.故命公及右政丞金士衡.商議촉免蘇息之方.三月.上命於行在所.臺諫侍從者.一切還京.蓋欲革잔率從之煩多也.公縷述而申言之.其意蓋謂無臺諫.則無直言.直言者.君上之所不可一日無也.四月.以辨定都監良賤之事.傳旨都堂.適時宜多遵行.五月.命公引見各道孝廉茂才.放其無實效者七十餘人.又承命.依宋太祖內帑故事.別置有備庫.以應軍需.其所入錢穀布貨.令三司會計.量入爲出.如有兵興.臨時啓聞.量宜調度.永爲恒式.閏五

 

月.上命史官.進卽位以來史草.上問公曰.當時史記.君王未得見.何也.公對曰.史.直書不諱.若君王大臣.自見則恐有諱忌.不直書故也.因年旱.公傳王旨.罷宮闕工役.八月.奉化伯鄭道傳.宣城君南誾.及富城君沈孝生等.謀害諸王自.不克.伏誅.策永安君爲世子.九月公以都承旨.兼尙瑞尹.上謂公曰.予罹疾病.久未聽政.一日萬機.其可廢乎.今欲傳位于世子.爾其命文臣製敎書以進.公卽命吏曹典書李詹.製進.定宗卽位.上父王尊號爲上王.十月.論第定社功臣.命公傳旨.己卯二月.太上王.欲移御芳蕃故第.臺諫及都堂.上言爭之.上命公.以其壯.轉申于太上王.竟不果.時.船軍.爲民弊.憲府爭之.上命公傳旨都堂.會議以聞.公與之審議.咸鏡江原則以其地深僻.罷之.餘道.減十之一二.民甚便之.公.藻鑑出人.五月.承命.取生員李約從等百人.宗親義安公.和之子漸.亦中試.上曰叔父之子.以宗親.中試.固非常例.命經筵侍讀官.裵仲倫.與集賢殿.尙瑞司.及三館諸儒.詣安公第.以賀.盛擧也.八月.左政丞趙浚.上箋乞辭.略曰.臣聞盛滿不止.蕭何所以自辱.封留知足.張良所以保全云云.時上有夢兆.使公.展浚箋讀訖.命不允.冬十月.以太上誕日.遣公獻表裏及衣대.太

 

上王.特賜公網笠.段子衣.各一.庚辰正月.王子芳幹.作亂.上使公往諭之.公未至.芳幹已擧兵.公追至善竹橋.宣旨.芳幹不從.亂旣平.二月.策定安公爲王世子.上命公傳旨都堂曰.國本定然後.衆志定.今者之亂.正以國本未定故也.予有孼子.考其生之月日.未協於期.且又昏弱.置之于外矣.且古之聖王.雖有嫡嗣.亦擇賢而傳之.母弟靖安公.開國之初.有大勳勞.又於定社之際.吾兄弟四五人.得保性命.皆其力也.今命爲世子.且令都督內外諸軍事.政府庶司.聞命陳賀.上命公.以其事實聞于太上王.公在知申凡三年.知無不言.言無不切.其所以稱王旨.諧百僚.咸期于治者.敏給周편.明白懇摯.尤於前後王.世子之變.炳幾燭微.不激不隨.而處之綽有餘地.詩所稱.庶幾夙夜.以永終譽者.則可謂云爾已矣.七月.爲簽書.上率世子及百官.朝也.十月.太宗卽位.公陞簽書三軍府事.以賀正使.如明京.獻貢馬三十疋.兼請印誥.辛巳三月.公還自明.九月.轉司平右使.十月.憲司劾罷之.以其犯奔競宇政丞之第也.十二月.敍用爲藝文館大提學.壬午正月.出爲慶尙道道觀察黜陟使.公攬변登車.慨然有澄淸之志.旣志.麗季積弊.察擧無遺.以除民막.變士習.爲先務.吏民手額以待之.七月.以旱災.引罪請辭.不允.俄拜參贊議政附事.九月復爲司平右使.癸未正月.充館伴.明使.贈以玉帶.公告政府.送于尙衣院.八月.還藝文館大提學.十一月.移大司憲.乙酉正月.拜禮曹判書.公奏請前朝.依宋朝故事.中書令.領僉議.領門下.俱不坐本部署事.惟朝會押班.今領議政府事.卽前朝門下也.以六衙日.坐本府.斷大事.唯朝會押班.有賀禮.署名上箋.允之.四月.諸郡縣.連三日有風雹霜雪之災.上自責甚.會諸臣議.兵判南在.則曰常事身.戶判李至.則對以宰相不稱職.公對曰.殿下宜日愼以答天譴.上嘉納之.七月.移判刑曹.八月.與重臣議遷漢都.公與焉.丙戌二月.復薦禮曹.時明遣使黃儼.奉銅佛將入國.公爲接伴.啓曰.往자.有西域一僧.來至京師.帝以爲生佛.率千官.冠帶郊迎.以是觀之.欽差官等.入京之日.殿下亦宜率百官.具朝服郊迎.以示爲天子尊敬之義.代言尹思.駁之以녕佛.上 不崇佛.不果.依公言.遣官人送香.七月.明使黃儼.至館.怒上不親迎.恣行己志.靡所不爲.甚至侮辱主上.鞭복守令.郡縣疲於供億.公之豫於凡事.此類也.十一月.上御便殿.議給田.上謂戶判李至曰.今科田遞受之例.夫亡有子而更適人者.收奪其田.亡夫子女.亦不之給.母雖失節.以父之心觀之.則於其子女.豈無慈愛之心乎.以父之心.移給子女.豈不可乎.公對以經濟六典所載.父死有子息者.全科遞受.無子息則減半遞受.本非守信者.不在此限.所以勸守信也.事下政府議.竟不施行.丁亥十一月.上命佐命功臣辛克禮禮葬.督禮曹.議等第狀啓以聞.公啓請用中等例.上曰克禮.功臣一等當用上等例.公復啓曰.功臣禮葬.以爵秩高下.定上中下三等.不用功臣一二等位例.上命政府擬議.參酌公言以施行.十二月.公依政府啓.上言.詳定十司.兼上護軍.統屬.號令所出之制.從之.戊子二月.判戶曹.五月.爲藝文館提學.旋移大提學.十一月.以進獻使.如明.己丑閏四月.公還國.九月.復拜大司憲.時.原平君尹穆.漢城少尹鄭安止.言及懷安及無疾.無咎等事.逮囚巡禁司.公與委官參贊李至.左司諫朴習.刑曹參議金自知.判巡禁司事南在等.交坐鞫問.竝請重刑.上謂尹穆之言.乃是閒談.且非執權大臣.則勢無能爲.況功臣不可處斬.遂不允.臺諫伏閤.公與朴習.繼議政府而交章上言.極陳功臣之不可私.穆罪之不可宥.俄而.穆辭引諸人.丹山府院君李茂.戶判李彬.平康君趙希閔.瑞城君柳沂等.幷下獄.公上疏,復論李茂之罪.略曰.國之安危.係于大臣.爲大臣者忠直正大.進賢去邪.與社稷同休戚.職也.今李茂.別無才德.再蒙勳典.位至極品.雖至미粉.難報殿下罔極之恩.計不出此.反結亂臣.罪在不忠.其實有六.歷擧實事而條陳之.請令攸司.鞫問其情.明正其罪.以安社稷.上雖認公危懇.而終不許其處刑.公草此疏旣訖.忽言曰.羅織人罪.臺諫以此.凡三疏劾公.議政府.亦啓公.親自鞫囚.乃謂羅織人罪.是其心.必異.請問其狀.上召問公.公對曰.臣以司憲之長.共察獄辭.但以未易得情.私自語身.非謂本無罪.而國家羅織之也.上曰.是特自謙之辭.其釋勿問.俄免職.辛卯五月.爲開城留後司留後.進稼穡圖.後又進多年種甘草一盆.及千葉冬栢.上賜賚來人甚厚十月上啓.命禁三司申判楮貨.用戶曹楮貨.從之.壬辰四月.還給舊京民品米.戶米.依公陳達也.甲午二月.入爲參贊議政府事.六月朔日壬寅.公卒.享年五十七.上震悼輟朝三日.賜厚賻.官給喪事.特贈上相.兼帶如例.用尊賢貴義.心能制義.二法諡.爲恭度公.配貞敬夫人忠州崔氏.父侍中良靖公.濂.生六男三女.男長孝仁.戶判.次孝義.工判.次孝禮.禮判.次孝智.刑判.同知敦寧府事.次孝信.判敦寧府事.次孝常.知敦寧府事.諡安靖.女長適尹번.坡平府院君.實誕貞熹王后.次適柳介同.次適邊永人.文科.孫曾以下不錄.公之藏.曾在廣州수洞之辛坐原.歲垂半天餘矣.월光復之二十七年辛亥.因都會擴張.天폄天安之九星洞.枕乾原.自當局報償巨賚.則各派雲仍.相與위曰.吾祖基業.可分食乎.遂同心克濟.傑構丙舍.廣置甫田.苾芬孝祀.勿替引之.又購入層屋于京街.凡先事之未篁者.抵此賴之.知公德蔭之流於無窮也有如是.竊惟公應時挺生.德業文章.才志經倫.固足以有爲.譬如棟梁之撑厦.蓍龜之應物.以興儒學.敍彛倫.爲裕國之基.以斥異道.闡名敎.爲化民之本.勒之鐘鼎.垂之竹帛.民到于今.受其賜大矣.鄒夫子有言.五百年.必有王者興.其間必有名世者.殆公之謂歟.太史氏.盛稱公以精敏適時才.意其有默契者矣.享于兩南之西溪.道川.金溪.凡三祠.嗟夫世代旣邈.文獻缺如.寂寞窮山.且闕顯刻矣.曾於辛亥之移취也.宗任在玟.邀樊溪金公以大碑之文.毅齋成公繼撰幽誌.而未及乎척史據實.後孫諸宗.庸是爲恨.荏苒歲月.三紀以近.乃於戊寅秋.會長昆煥.謁余改銘而曰.子於世德實紀之行.有宿緣.知吾祖.莫子若.幸卒惠也.烏敢以不文.且非其人辭.謹詮次史乘所載如右.若夫家錄及諸名勝之漫爾撰述者.則可者存之.不可者拔之.未知月旦者出.其肯許 之否乎.銘曰

 

 運當五百.山川鍾毓.烏川挺生.萬夫之特.早師栗亭.牧圃請益.贈說伯中.中庸勸讀.敦尙儒業.緇敎是斥.大擅文章.魁科早擢.王曰嘉乃.합予啓沃.置之喉司.密勿유幄.任之臺諫.如矢其直.潭潭府中.百僚拭目.歷典藩屛.主盟館閣.凡諸簡選.孰非稱職.致澤君民 陶成禮俗.棟梁大廈.蓍龜宗國.生爵死贈.人臣榮極.苗裔齎恨.再圖貞石.良史特書.百世如昨.家錄諸獻.云何臆測.取舍簡拔.我述不作.賢大夫藏.過者必式.

 

歲舍戊寅中秋節                  月城   李鍾洛   謹撰

 

해설

 

참찬 의정부사 증 영의정 공도 이공 휘 문화 신도비명병서

 

옛적 조선태조가 고려를 혁명할 때 많은 인재들이 임금을 도와 초창기의 왕업을 만들어 튼튼한 기반 위에 이어가게 되었다. 이때 烏川李先生 恭度公은 태조의 옛 친분으로서 중요직에 발탁되어 太祖, 定宗, 太宗 세 조정을 섬겼다. 내직으로는 정부 각 기관,외직으로는 경기, 영남, 호서, 호남 모든 지역의 안렴, 도절제사등 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儒學을 돈독히 하고 佛敎를 배제하여 조선 五百年 文治의 시작이 되었으니 아! 거룩하도다.

 

인천이씨의 역사는 길다. 당초에 가락왕자로서 母姓을 따라 許氏가 되었다. 휘 奇에 이르러 安祿山의 난리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좋은 공적이 있자 황제는 그를 가상히 여겨 邵城伯을 봉하고 李氏姓을 내리니 이분이 인천이씨의 시조가 되며 그후 世系를 잃고 李許 복성으로 일컬어졌다. 一世에 許謙은 고려에 벼슬하여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翰을 낳으니 상서좌복야이며 시호는 文景公이다. 이분이 子祥을 낳으니 상서우복야이다. 이분이 預을 낳으니 평장사이며 시호는 文顯公이다. 이분이 公壽를 낳으니 문하시중이며 시호는 文忠公이다. 이분이 之저를 낳으니 평장사이며 시호는 文正公이다. 이분이 世興을 낳으니 한림원 대제학이요. 이분이 文淵을 낳으니 예빈동정이요. 이분이 核保를 낳으니 상의직장이요. 공에게 오대 이상이 된다.

 

양온서숭 迪元, 제능서직 泌, 중서사인 益歲, 전공판서 深은 공에게 고조, 증조, 할아버지, 아버지가 되며 어머니는 安東權氏이다. 공은 공민왕 戊戌(一三五八)에 탄생하니 휘는 文和요, 자는 伯中이요. 烏川은 그의 호이다. 자품이 특수하고 기국이 장중하여 아이 때부터 대인 군자의 기상이 있더니 취학함 에 학업이 날로 진보되고 識見이 깊고 넓으며 예의로써 몸을 간직하고 孝友에 돈독하여 부모의 곁에서는 늘 화한 모습이었으며 뜻을 알아 승순하였고 부모상에 六年 간을 시묘하였다.

 

어릴 때부터 栗亭 尹公에게 배우고 때로는 牧隱, 圃隱 두 先生의 문하에  배웠으며 명성이 높았전 李陶隱, 權陽村, 金桑村, 卞春亭과도 서로 강마하며 친분이 좋았다. 禑王 庚申(一三八○)년에 공의 나이 二十三에 進士로서 대과 일등에 장원하니 공과 같은 분은 세명 뿐이었다.

 

목은은 장원시를 기증하고 또 伯中에 대한 字說을 지어 中庸 읽기를 권하면서 권면을 깊이 하였으니 여기에서도 공을 알 수 있다. 우정언, 우헌랍, 예문응교등에 임명되었다. 공은 조정에 나갔다가 君臣들이 밤에 잔치를 하면서 손뼉을 치며 즐기는 모습을 보고 탄식하기를 「이 모습 어찌 선비로서 관록을 먹을 시기이겠는가」하고 드디어 진취할 뜻을 포기했다.

 

壬申(一三九二)년에 태조가 등극했다. 이해 九月에 여러 도의 안렴사를 임명해 보내는데 공은 좌간의대부로서 경기좌도에 임명되었다.  임금은 「내가 덕이 부족한 사람으로 臣民의 추대를 받고 보위에 오르니 아침부터 밤까지 힘을 다하지만 모든 정치가 잘될 수 있기에는 中外의 책임자를 의뢰하게 되는데 더구나 경기도는 왕실과 밀접하니 어느 지역보다 덕화를 먼저 펴야할 것이다. 백성에게 편리한 일이 있으면 속히 거행하여 나의 새로은 정치를 도와다오」했다.

 

甲戌(一三九四)년에 판교서감사에 전직되었다. 이때 창평헌령 愼原節이 군관을 거느리고 왜적 七명을 죽였으며 한명을 생포했다. 공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궁중의 술과 비단을 하사했다. 乙亥(一三九五)년 정월에 다시 軒官이 되었다. 이때 조정에선 檢校侍中의  직을 함부로 老臣들에게 제수했다.

 

공은 상소하여 간하기를 「名器란 임금이 현인을 대우하고 공로를 포상하는 것이니 무겁게 아니할 수 없으며 더구나 시중이라함은 재상의 자리이니 비록 검교시중이라도 경솔히 아무 사람에게나 주어 명분과 직위를 혼잡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등이 보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功罪와 덕행을 따지지 않고 늙은 이유만으로써 검교의 자리를 八, 九명에게 갑자기 주시니 이처럼 남용할 수는 없습니다. 비옵건대 검교시중의 남용을 일체 혁파하시옵소서」 했다. 임금은 이를 받아 들이지 않으니 여론은 애석하게 여겼다. 丁丑(一三九七)년 五月에 좌승지에 임용되었다. 임금은 宣差 權專을 보내 공을 甫州喪次로 불러 왜인 포획에 관한 일을 논했다. 九月에 入侍하여 洪範을 강했다.

 

태조는 고려 충숙왕의 예에 의거 居士의 칭호로써 奉化伯에게 편지를 보내고져 공에게 묻자 공은 潛邸 때의 軒號(堂號)를 쓰도록 대답하니 임금은 윤허하여 松軒居士로 號를 했다. 戊寅(一三九八)년 二月에 도승지에 승진되었다. 임금은 회암사에 행차하여 王師 自超를 만나보고 楓川에 머물며 특별히 공을 불렀다. 이때 淮陽, 金化, 金城등 여러 고을이 東北面(함경도 지역)의 목, 익, 도, 환(태조이상의 사대 추존한 임금) 四時 제향으로 인하여 사신들의 왕래가 많은 민폐를 끼치므로 공 및 우정승 金士衡에게  명하여 민폐를 줄일 방법을 의논했다.

 

三月에 임금은 명령하기를 「行在所에게 侍從한 사헌부, 사간원의 직원을 모두 서울로 돌려보낼 것이라고」함은 번폐스런 수행원의 제도를 혁파하자는 것이다. 공은 그에 대한 부당함을 반복하니 공의 의도는 臺諫이 없으면 곧은 말을 들어 길이 없으면 곧은 말이란 임금으로서 하루도 없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四月에 辨定都監의 양민과 천민에 관한 일로 왕의 뜻을 의정부에  내리어 시의에 맞추어 많은 시행을 했다. 五月에 임금은 공에게 명령하여 각도에 孝廉茂才를 접견하고 사실이 없는 七十여명은 추방했다. 또한 왕명을 받아 宋太祖의 內노에 관한 고사에 의거. 특별히 有備庫를 설치하여 군수 물자에 대비하고 납입된 錢, 穀, 布, 貨를 三司에서 회계를 맡아 수입에 의해 지출을 하게 하고 만약 병란이 있으면 임금께 아뢰어 쓸 수 있도록 영원한 법칙을 마련했다.

 

五月에 임금은 史官에게 명령하여 즉위한 이후의 史草를 올리라 하고 임금은 공에게 묻기를 「현존한 임금이 그 당시의 사기를 보지 못하게 된 이유는 무었 때문인가?」했다. 공은 대답하기를 「사기란 숨김없이 써야 하는데 만약에 임금이나 대신이 이를 보게 된다면 숨김이 있고 사실 그대로를 곧게 쓰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하였다. 가뭄으로 인해 공은 왕명을 전달 궁궐의 공사를 중단했다.

 

八月에 봉화백 鄭道傳, 선성군 南誾, 부성군 沈孝生등이 여러 왕자를 가해 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처형되고 영안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九月에 공은 도승지로서 상서윤을 겸임했다. 임금은 공에게 말하기를 「내가 질병에 걸려 오랜기간에 국정을 수행하지 못하였으니 하루라도 닥쳐오는 모든 정무를 어찌 폐할 수 있겠는가? 이제 왕위를 세자에게 전하고져 하니 너희는 文臣들로 하여금 敎書를 지어 올리라」했고 공은 이 명령을 즉시 이조전서 李詹에게 전하여 글을 짓게 했다.

 

정종은 즉위하여 父王에게 上王의 존호를 올렸다. 十月에 정사공신의 등급을 논하고 공에게 명하여 전달했다. 己卯(一三九九)년 二月 太上王은 芳番의 예집으로 거처를 옮기려 하자 대간과 의정부에서 글을 올려 간했다. 임금은 공에게 그들의 上啓를 태상왕에게 올리므로 태상왕은 끝내 뜻대로 이루지 못했다. 이때 船軍이 민폐가 되었다. 사헌부에선 이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임금은 공으로 하여금 왕명을 의정부에 전하여 논의해서 아뢰라 하니 공은 그들과 심의를 거듭하여 함경도와 강원도는 지역이 궁벽함으로 선군을 혁파하고 다른 도는 十에서 一, 二분을 감축하니 백성들은 이를 반가워 하였다.

 

공은 藻鑑이 남보다 뛰어나서 五月에 명령을 받고 생원 李約從등 백명을 선의 아들이 종친으로서 합격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하고 경연시독관  裵仲倫에게 명하여 집현전, 상서사 및 三館의 모든 선비와 더불어 의안공의 집에 가서 축하를 하게 하였다.

 

八月에 좌정승 趙浚은 글을 올려 사표를 청했다. 대략에 이르되 「盛滿에도 그칠 줄을 알지 못한 것은 蕭何가 곤욕을 자취한 것이요. 留侯를 봉하자 만족함을 알고 물러난 것은 張良이 신명을 보전한 것입니다」했다. 이때 임금이 무슨 夢兆가 있어 공으로 하여금 조준의 글을 읽어 파악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十月에 태상왕의 誕日로써 공을 보내어 衣服감과 衣服을 올리니 태상왕은 특별히 공에게 망건과 갓 그리고 段子衣 한벌을 하사했다.

 

庚辰(一四○○)년 정월에 왕자 芳幹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임금은 공으로 하여금 가서 타이르라 했다. 공이 당도하기 전에 방간은 이미 군사를 일으켰다. 공은 선죽교까지 따라가서 왕명을 전달하니 방간은 따르지 않았다. 난리가 평정되자 二月달에 정안공으로  왕세자를 삼고 임금은 공에게 명하여 아래와 같은 왕명을 의정부에 전달했다. 國本(세자를 말함)이 정해진 뒤에 백성의 뜻이 안정되는 것이니 금번의 난리는 국번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게 서자가 있으나 나이가 어리고 또한 昏弱하므로 제쳐놓았다. 옛 성왕이 비록 적자가 있더라도 또한 어진이를 선택하여 나라를 전한 것이다. 정안공은 개국 초기에 큰 공로가 있고 또한 芳碩의 난을 평정할 때 우리 兄弟 四, 五명이 생명을 보전한 것은 모두가 그의 힘이다. 이제 그를 명하여 세자를 삼고 또한 內外에 군국 대사를 총 감독에게 하노라 하였다.

 

정부와 백관들은 이 명령을 듣고 하례를 올렸으며 임금은 공에게 명령하여 그 사실을 太上王께 아뢰었다. 공은 동승지 三년 동안에 아는 일을 말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말을 했다면 절실하지 않음이 없어 王旨를 알맞게 하고 百官과의 조화가 이룩되어 다스림의 효험을 기약할 수 있었으니 민첩하고 원만하며 명백하고 진지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전후 왕자, 세자의 변란에 기미를 밝게 살펴 과격하거나 따르기만도 않으면서 여유있게 대처하였으니 詩經에 이른바 「아침부터 밤까지 조심하고 경계하여 좋은 명예를 길이 보전한다는」 말이 공에게 맞는 말이라 하겠도다. 七月에 공은 簽書에 임명되었다. 임금은 세자 및 백관을 거느리고 덕수궁에 조회하여 玉冊을 받든 끝에 태상왕께 헌수를 하자 태상왕은 또 공에게 비단 한필을 하사하여 세자 책봉에 관한 공로를 표창 하였으니 전후에 걸쳐 모두가 특별한 은총이었다. 十月에 태종이 즉위하자 공은 첨서三軍府事에 승진되었다. 하정사로써 명나라 서울에 가서 貢馬 三十疋을 바치고 겸하여 印誥를 청했다.

 

辛巳(一四○一)년 三月에 공은 명나라에서 돌아와 九月에 사평우사에 전직 되었는데 十月에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파직을 요하니 재상의 집에 출입했다는 이유였다. 十二月에 예문관 대제학으로 다시 등용되었다.

 

壬午(一四○二)년 정월에 경상도 도관찰 출척사로 임명되니 공은 말 고삐를 잡고 수레에 올라 慨然히 지방 행정을 맑게 해 보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임지에 당도하자 麗末의 적폐를 빠짐없이 들추어 백성들의 폐해를 제거하고 士習을 개선함을 우선으로 삼으니 吏民들은 손을 들어 기대했다. 七月에 심한 가 뭄이 들자 스스로 책하여 사직을 청했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았다, 얼마 뒤에 참찬의정부사가 되고 九月에 다시 사평우사로 전임되었다.

 

癸未(一四○三)년 정월에 館泮에 충원되었다. 명나라 사신은 玉帶를 공에게 기증했는데 공은 이 사실을 정부에 알리고 그것을 상의원으로 보냈다. 八月에 예문관 대제학으로 다시 임명되었다가 十一月에 대사헌으로 옮겼다.

 

乙酉(一四○五)년 정월에 예조판서가 되니 공은 아뢰어 청하기를 麗朝에서 宋朝의 옛 일에 의거하여 중서령, 영첨의, 영문하는 모두 본부에 출근하여 집무를 하지 않고 오직 조회할 때에 백관의 위차를 관리할 뿐이었습니다. 지금의 영의정부사는 곧 전조의 문하성에   해당하니 六衙日로써 본부에 출근하여

 

큰일을 결재하고 오직 조회에만 백관의 위차를 관리하며 하례할 일이 있으면 서명을 하여 箋文을 올리게 하시옵소서 하니 임금은 이를 윤허했다. 四月에 여러 군, 현에서 연 사흘동안 태풍, 우박, 서리의 재변이 있었다. 임금은 크게 자책을 하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의논을 하니 병조판서 南在는 「이는 보통일입니다」했고 호조판서 李至는 「재상이 직책을 이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했고 공은 「전하께오서는 마땅히 하루 하루를 삼가서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시옵소서」하니 임금은 이를 좋게 받아들였다. 七月에 형조판서로 옮겼다. 八月에 중신과 더불어 서울로 도읍을 옮길 것을 논의하는데 공도 이에참여했다.

 

丙戌(一四○六)년 二月에 다시 예조판서로 옮겼다. 이때 명나라에서 사신 黃儼을 보내어 불상을 받들고 국내에 들어오려 했다. 공은 접반사가 되자 아뢰기를 「지난 날에 西域에서 한 승려가 중국의 서울에 당도하자 황제는 그이를 생불이라 하여 모든 관료를 거느리고 郊外에 나가 영접하였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欽差官등이 서울에 들어오는 날에 전하께서도 또한 백관을 거느리고 조복을 갖춘 채 교외에서 영접하여 天子를 위해 존경하는 의의를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했다. 대언 尹思는 공의 말을 佛像에 아첨하는 것이라고 논박했다. 임금도 본디 불도를 숭상하지 않는 터인지라 공의 말에 따르지 않고 官人을 시켜 향만 보냈다. 七月에 명나라 사신 黃儼이 당도하자 임금이 직접 영접하지 않은 데에 격노하여 자기의 뜻대로 못할 일이 없이 심지어는 임금을 모욕하고 수령을 매질하니 郡縣에선 이들을 받드느라 곤욕을 치르게 되었으니 여기데서도 공은 모든 일에 치밀한 예비책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十一月에 임금은 便殿에 납시어 給田에 관한 일을 심의했다. 임금은 호조판서 李至에게 말하기를 「현재 科田을 교체 인수하는 규례에 남편이 죽고 아들이 있어도 개가를 하면 그 전토를 몰수하고 죽은 남편의 자녀에게도 주지 않는다 하니 어머니는 비록 개가했어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본다면 자녀에게 주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했다. 공은 대답하기를 「經濟六典에 기재된 바로는 

『아버지가 죽었어도 자식이 있는 자에 한해서는 전체의 밭을 불려받고, 자식이 없으면 절반을 물려받되 본래 수절을 않은 자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하였으니 이는 수절을 권장하자는 것입니다」했다. 안건이 의정부에 내려져 심의 했으나 마침내 시행되지 않았다.

 

丁亥(一四○七)년 十一月에 임금은 좌명공신 辛克禮의 예장을 명하고 예조에게 재촉하여 예장의 등급을 의논해서 알리라 했다. 공은 中等의 예로 할 것을 啓請하니 임금은 말하기를 「신극례는 一等공신이니 마땅히 上等의 예로 거행할 것이다」했다. 공은 다시 啓辭를 올리어 「공신의 예장은 직듭의 高下」로써 上, 中, 下 三등을 결정하는 것이요 공신 一, 二등의 등급에 비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했다. 임금은 의정부에 명하여 공의 말을 참작 시행하게 했다. 十二月에 공은 의정부의 계사에 의거. 十司, 兼 上護軍의 통솔과 명령권 발동의 제도적 결정을 아뢰니 임금은 그에 따랐다.

 

戊子(一四○八)년 二月에 호조판서가 되고 五月에 예문관 제학이 되었다가 바로 대제학으로 옮겼고 十一月에 진헌사로써 명나라에 갔다. 이듬해 己丑년 윤사월에 공은 본국으로 돌아왔고 九月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때 원평균 尹穆과 한성소윤 鄭安止가 회안군 및 閔無疾, 無咎등에 관한 사실을 언급하다가 순금사에 체포되었다. 공은 위관참찬 李至, 좌사간 朴習, 형조참의 金自知, 판순금사사 南在등과 더불어 교대로 국문을 하고 중형에 처할 것을 주청했다. 임금은 말하기를 「윤목의 말은 한담설화로 한 것이요 또한 집권 대신이 아니므로 그러한 법죄를 저지를 만한 세력도 능력도 없다. 하물며 공신은 참수형에 처할 수 없는 것이다」하고 윤허를 하지 않았다.

 

대간은 궁전앞에 엎드리고 공은 朴習과 더불어 의정부를 이어 교대로 상소를 하여 공신이라고 죄를 묻지 않을 수 없으니 윤목의 범죄는 사면할 수 없다고 끝까지 진달했다. 얼마 뒤에 윤목의 사건에 여러 사람과 연결되어 단산부원군 李茂, 호조판서 李彬, 평강군 趙希閔, 서성군 柳沂등도 모두 하옥되었다. 공은 상소를 올려 다시 李茂의 죄를  논하기를 「국가의 安危는 대신에게 매었으니 대신은 충성하고 곧으며 正大하여 어진 人才를 찾아내고 邪惡을 제거하여 기쁨과 슬픔을 社稷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제 李茂는 별다른 才德도 없는데 두 차례의 포상을 받고 직위가 최상에 올랐으니 비록 몸을 부수고 뼈를 갈아도 전하의 망극하신 은혜를 보답하기 어려운데 그러하지 못할 뿐아니라 도리어 난신과 결탁하여 불충한 죄가 여섯가지가 있다」하여 낱낱이 열거하고 해당 부처로 하여금 정실을 국문하고 죄상을 밝혀내어 사직을 안정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임금은 비록 공의 간곡한 충정을 알면서도 끝내 그의 처형은 윤허하지 않았다. 공은 이 상소를 써놓고 하는 말이 「남의 죄를 얽어 만들지 않나?」 하였는데 대간에선 이 말을 가지고 세차례에 걸쳐 공을 탄핵하고 의정부에서도 또 한 계사를 올려 이르기를 「공이 직접 죄수를 국문하는 입장에 무단히 남의 죄를 얽어 만든다는 말을 하였으니 그 마음은 다른 것입니다. 그의 진상을 심문 하소서」하니 임금은 공에게 물었다. 공은 대답하기를 「신이 사헌부의 장관으로서 옥사를 심리할 때 정실을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서 社談으로 한 말이고 그들이 본래 죄가 없는 것을 국가에서 얽어 만들었다는 것은 아닙니다」했다. 임금은 말하기를 「이는 단지 스스로 겸손한 말이니 다시 묻지 말라」 했다. 얼마 있다 면직을 당했다.

 

辛卯(一四一一)년 五月에 개성유후사 유후가 되자 稼穡圖를 올리고 뒤에 또한 분재로 다년생 감초 한 그루와 천엽 동백을 올리니 임금은 가지고 온 사람에게 많은 저화를 하사했다.  十月에 三司신판 저화의 사용을 금지하고 호조저화를 사용할 것을 아뢰어 실현시켰다. 壬辰(一四一二)년 四月에 송도의 백성에게 品米와 戶米를 돌여주니 공의 진달에 의한 것이다.

 

甲午(一四一四)년 二月에 참찬의정부사에 임명되고 六月 초하루 壬寅에 공은 세상을 버리니 향년 五十七세이다. 임금은 놀라고 애도를 하여 三日동안 조회를 폐지하고 후한 부의를 하사하며 관에서 상사를 지급하고 특별히 영의정을 증직했으며 겸직을 준례와 같이 했다. 현인을 높이고 의리를 귀중히 〔尊賢貴義〕 여기며 마음씀이 의리에 맞는다 〔心能制義〕는 두가지의 시법을 써서 恭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배는 정경부인 忠州崔氏니 아버지는 侍中 良靖公 濂이다. 六남 三녀를 낳으니 장남 孝仁은 호조판서요. 다음 孝義는 공조판서요. 다음 孝禮는 예조판서요. 다음 孝智는 형조판서 동지돈령부사요. 다음 孝信은 판돈령부사요. 다음 孝常은 지돈녕부사요. 시호는 安靖이다. 장녀는 尹번에게 출가하니 파평부원군이며, 정희왕후(세조왕비)를 탄생하였다. 다음은 柳介同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邊永仁에게 출가하니 문과에 급제했다. 손, 증 이하는 기록치 않는다.  공의 묘가 일찍이 廣州 숙동 辛坐의 자리에 있어 五百여년이 되었는데 광복 二十七년 辛亥(一九七一)에 서울시의 확장으로 인하여 천안 구성동 乾坐의 자리로 이장하게 되었다.

 

당국으로부터 거액의 보상을 받게 되자 각파의 후손들은 서로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의 基業을 나눠 없애면 되겠는가」하고 드디어 마음을 합해 잘 처리하므로 걸사의 재실을 짓고 많은 위토를 마련하여 풍성한 제사로 길이 유지토록 하고 또한 六층의 건물을 서울에서 구입하여 미처 못했던 先事들이 여기에서 많은 힘을 얻게 되었으니 공의 덕음이 무궁하게 흐름을 알 수있도다.

 

그윽히 생각건대 공은 시운에 부응하여 뛰어난 작품으로 덕업 문장과 재능 경륜이 국가의 이바지에 충분하였다. 비유컨대 棟梁이 큰 집을 버티고 蓍龜가 사물을 점치는 것과 같다 하겠다. 유학을 일으키고 인륜을 펴는 것으로써 나라를 유지하는 터전을 삼고 이단을 배척하고 名敎를 밝힘으로써 백성을 교화시키는 근본을 삼았다. 그리하여 그 이름 鐘靖에 새겨지고 역사에 드리웠으니 우리 민족이 지금까지 큰 혜택을 받았다 하겠다. 맹자께선 말씀하시기를 「五백년이 되면 반드시 왕자가 나오게 되며 그 시기에는 반드시 드높은 명성으로 한 세상을 울리면서 그를 보필할 수 있는 인재가 있게 마련이다」하셨으니 아마도 공같은 분을 이른 것인가 생각된다. 역사가에선 공을 정통하고 민첩하며 시대에 맞는 인재라고 아낌없는 칭찬을 하였으니 맹자의 말씀과 무언의 일치라 하겠다. 영·호남 두 지역에 서계서원, 도천사, 금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아! 세대는 멀고 문헌이 결여되어 적막한 窮山에 功과 業을 나타내는 墓碑도 없었는데 辛亥년 이장할 때 宗任 在玟이 樊溪 김공에게 신도비문을 청하였고 毅齋 성공은 이어 묘지문을 지었으나 王朝實錄을 참고함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후손들은 이를 한스럽게 여기면서 세월은 三十年이 흘렀다.

 

戊寅(一九九八)년 가울에 이르러 회장 昆煥이 나에게 신도비명 다시 지음을 청하면서 「그대는 소성세덕과 오천실기를 간행할 때부터 오랜 인연이 있었으니 우리 선조의 사실을 알기에는 당신 같은 이가 없으니 이 글을 지어 마무리를 잘해다오」 하였다.

 

어떻게 문사나 또는 인망이 아님으로써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삼가 역사의 기록을 우와같이 간추려 쓰고 나머지 家錄이나 제가의 적합치 않은 글에 대해서 긍정이던, 부정이던, 후세의 評論에 맡길 뿐이다. 명에 이르되

 

五백년의 운을 당하자,

산천은 정기를 모았네,

오천선생 남달리 태어나니,

만인 중에 특별한 분이라네.

어린 나이에 尹栗亭을 스승으로 섬기고,

목은, 포은에게도 배움을 청했으니.

伯中의 자설 기증하여,

中庸 읽기를 권하였지.

유자의 업을 돈독히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였네.

독점한 문장력으로서,

二十 대에 장원급제 하였도다.

왕은 말씀하길를 「가상하여라,

어찌 나를 돕지 않으리오」하고.

승정원에 배치하니,

임금의 참모진이 되었고.

대간에 임명하자,

화살 같이 곧았구려.

깊고 넓은 의정부에서는,

모든 백관들 눈을 비비고 보았네.

외직으로 도관찰을 역임하고,

예문관의 수장이 되었으니.

이 모든 선발은,

도처에 알맞은 직책이로세.

임금을 잘 되게 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주며,

禮俗을 이룩해냈어라.

큰 집에는 棟粱이 되고,

나라에는 蓍龜가 되었지.

살아서 벼슬하고 돌아 가도 증직받았으니

신하된 영광 극에 달했구려.

여러 자손 한탄하다가,

두 번째 신도비를 세운다네.

국사에 대서 특서되었으니,

오랜 세월에도 어제 일만 같구려.

가록이나 제가의 문헌,

어이하여 많은 억측 자아냈나?

모든 취사와 선택에는,

있는 것을 기술할뿐 창작이 아니로세.

현대부의 묘소에,

지나는 사람 공경할지어다.

戊寅 中秋節에 月城 李鍾洛 지음.

 

【註】

 一, 통재(通才):온갖 사물에 능통한 재주.

 二, 위기(偉器):훌륭한 器局 卽 큰 그릇.

 三, 빈연포열(嬪然布列):많이 布陣되어 있는 모습.

 四, 반룡부봉(攀龍附鳳):용과 봉은 임금을 비유한 것임. 즉 영명한 임금을 비유한 것임. 즉  영명한 임금을 따라서 과업을 세움을 말함.

 五, 초매(草昧):천지가 비롯하든 어두운 세상 즉 초창기.

 六, 잠룡(潛龍):연못에 깊이 숨어 아직 昇天하지 않은 룡. 임금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이전을 말함.

 七, 암랑관각(巖廊館閣):암랑은 宮殿을 관각은 翰林의 別稱 弘文館과 藝文館.

 八, 반진(藩鎭):地方을 다스리기 위한 관청.

 九, 권여(權輿):사물의 시작. 즉 처음.

一○, 기도응중(器度凝重):도량이 크고 침작하고 태연한 모습.

一一, 이유(怡愉):화하고 즐거음.

一二, 여묘(廬墓) :상제가 무덤 가까이에 막을 짓고 지키는 시묘와 같은 말.

一三, 자설(字說):사람이 부르는 字에 대한 說을 말함. 古禮에 二十세가 되면 관례를 하고 父母나 스승으로부터 자를 부를 때 그에 대한 說는 문체의 하나임.

一四, 중용(中庸):四書의 하나이니 孔子의 孫子 子思가 지었음.

一五, 용비(龍飛):王으로 등극하는 것.

一六, 유신(維新):새로이 혁신하는 것.

一七, 검교시중(檢校侍中):검교는 麗末鮮初에 높은 벼슬 자리를 定員 以外에 臨時로 任命하는 직위.

一八, 명기(名器):爵位와 車服을 말함.

一九, 총재(총宰):큰 벼슬아치 지금의 국무총리.

二○,절견(竊見):가만히 본다는 말.

二一, 노모(老모):늙은이 노인.

二二, 자초(自超):麗末鮮初의 高僧無學大師의 俗名.

二三, 홍범(洪範):天下를 다스리는 大法. 夏의 禹王때 落水에서 神龜의 등에서 나타났다는 九章의 글. 書經의 篇名임.

二四, 상의(上議):서로 의논하다. 協議.

二五, 견면(견免):조세 따위를 면제함.

二六, 소식(蘇息):숨을 돌려서 쉼.

二七, 도당(都堂):議政府의 별칭.

二八, 효렴무재(孝廉茂才):효렴은 효도하고 절조를 지킴. 무재는 훌륭한 인재.

二九, 내탕(內帑):임금이 관리하는 비자금.

三○, 사초(史草):史官이 기록하여 史庫에  둔 史書.

三一, 복주(伏誅):臣下가 형벌로 주검을 당함.

三二, 정사 공신(定社功臣):芳碩의 난을 평정할 때 훈공이 있는 신하를 말함.

三三, 조감(藻鑑):사람의 됨됨이나 인품을 잘 알아보는 식견. 또는 文辭의 감별에 대한 유능한 식견을 말함.

三四, 성만(盛滿):부귀와 공명이 너무 충만함을 말함.

三五, 소하(蕭何):漢高祖의 功臣. 張良 韓臣과 더불어 漢의 三傑中 한사람. 재상의 자리에서 끝내 물러나지 않고 있다가 구속의 곤욕을 당한 일이 있음.

三六, 유후(留侯):留는 地名. 漢高祖는 張良을 留侯로 봉했으나 부귀 공명에 대한 만족도를 알고 이를 사양하고 은퇴하였음.

三七, 몽조(夢兆):꿈에 나타나는 吉凶의 징조.

三八, 국본(國本):나라의 근본 또는 太子. 世子. 

三九, 지신(知申):都承旨의 별칭. 

四○, 인고(印誥):국가의 공문서에 국인을 찍는 것. 

四一, 남비(攬비):말고삐를 잡아당기는 것. 

四二, 민막(民막):백성에게 폐가 된는 일. 民弊. 

四三, 육아일(六衙日):매월 여섯 번째 백관이 조회하고 정무를 임금께 아뢰는 날. 

四四, 흠차관(欽差官):中國 황제의 사신. 

四五, 옥사(獄辭):법정에서 피고가 자백한 내용을 기록. 

四六, 가색도(稼穡圖):농사짓는 방법을 도식으로 만든 것. 

四七, 품미 호미(品米, 戶米):품미는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관리들의 직품에 따라 거두어 들이던 쌀. 호미는 백성들에게 호당 조세로 거두어 들이던 쌀. 

四八, 시구(蓍龜):점치는 데에 쓰이는 톱풀과 거북. 훌륭한 인물을 묘사하는데 많이 쓰임.

四九, 명교(名敎):人倫의 名分을 밝히는 가르침.

五○,종정(鐘鼎):종과 솥. 歷史에 새겨진다는 말.

五一, 임염(荏苒):歲月이 遷延하는 모양.

五三, 월단(月旦):그달의 첫날 즉 朔日 月旦評을 말함. 이는 人物을 비평함.

 

 

● 숭덕사(崇德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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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덕사(崇德祠)

소재지 : 대구시 북구 서변동 881  

 

1781년(正祖 5)에 인천인(仁川人) 대제학좌참찬 증영의정 시호공도공 오천 이문화(大提學左參贊 贈領議政 謚號恭度公 烏川 李文和)를 주벽(主壁)으로, 그의 8세손이며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창의(倡義)한 태암공(苔巖公) 를 배향(配享)한 서계서원(西溪書院)이 1864년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1924년 문중에서 양위(兩位)를 배향(配享)하는 재사(齋舍)로 화수정(花樹亭)을 건립하였다.

 

조선말의 명필인 윤용구(尹用求)가 쓴 현판이 아직 남아있다. 그러다가 1992년 문중에서 훼철된 옛 자리에 사우(祠宇)인 숭덕사(崇德祠)와 함께 서계서원(西溪書院)을 복원(復元)하였다.

 

정침(正寢)은 방 3칸, 대청 3칸, 측면 2칸인데 원주(圓柱) 주춧돌 위에 홑처마 팔작지붕의건물이 화강석 기단 위에 건립되었다. 환성정(喚惺亭), 화수정(花樹亭)과 돌담으로 같은 경내(境內)를 이루고 있으며 넓은 뜰에는 정원수(庭園樹)로 조경(造景)하였고 대문인 향의문(向義門) 곁에는 서계서원 사적비(西溪書院 事蹟碑)를 세웠다.

 

 

● 서계서원(西溪書院) 화수정(花樹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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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서원

대구 서계서원(西溪書院:대구광역시 북구 무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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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정(花樹亭)

 

서계서원사적비명(西溪書院事蹟碑銘)

 

iclee2_03b-7.jpg이곳은 옛날 西溪書院(서계서원)의 遺址(유지)이다. 西溪書院(서계서원)은 朝鮮(조선) 太宗朝(태종조) 名臣(명신) 恭度公(공도공) 烏川 李先生(오천 이선생)을 主享(주향)으로 하고, 先生의 八世孫인 苔巖 李公(태암 이공)을 配享(배향)으로 한 書院이었다. 烏川先生은 諱文和 字伯中(휘 문화 자 백중)이니 仁川人이다. 高麗 恭愍王(고려 공민왕) 七年 戊戌生(무술생)이니 高麗 尙書左僕射 上柱國 邵城縣 開國後諱 許謙(고려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 휘 허겸)의 十四世孫이요 中書舍人知制誥 諱 益歲(중서사인지재고 휘 익세)의 孫이요 典工判書 諱 深(전공판서 휘 심)의 子이다.

 

어려서 栗亭 尹澤(율정 윤택) 先生에게 受學하였고, 커서는 牧隱 李穡(목은 이색)과 圃隱 鄭夢周(포은 정몽주) 兩 先生 門下에 從遊(종유)하였고, 陽村 權近(양촌 권근), 陶隱 李崇仁(도은 이숭인), 桑村 金自粹(상촌 김자수), 諸賢(제현)과 道義交(도의교)로서 文章經術(문장경술)이 當世(당세)에 드러나시었다. 朝鮮 太宗朝(조선 태종조)에는 諫議大夫 京畿道 按廉使 都承旨(간의대부 경기도안렴사 도승지)를 歷任(역임)하였고, 太宗朝에는 禮戶刑曹判書(예호형조판서), 嶺湖南按廉使(영호남안렴사), 左參贊議政府事(좌참찬의정부사)를 거쳐서 藝文館, 成均館大提學(예문관 성균관대제학)을 지냈다.

 

太宗十四年 甲午에 考終(고종)하시니 享年(향년) 五十七歲였다. 大匡輔國崇錄大夫 議政府領議政(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贈職(증직)되었고 諡恭度(시공도)라 내리었으니 즉, 尊賢貴義曰恭(존현귀의왈공)이요 心能制義曰度(심능제의왈도)라는 諡法(시법)에 依(의)한 것이다.

 

iclee2_03b-8.jpg苔巖公(태암공)은 諱字景任(휘주자경임)이요 又號(우호) 六休堂(육휴당)이니 明宗 丙申生(명종 병신생)으로서 全溪東慶昌(전계동 경창) 門下에 從遊(종유)하였고 鄭寒岡 逑(정한강 구), 張旅軒 顯光(장여헌 현광), 徐樂齋 思遠(서낙재 사원), 諸賢(제현)과 道義交(도의교)로 지내더니 壬辰亂(임진난)이 일어나자 義憤(의분)을 참지 못하여 徐樂齋 思遠(서낙재 사원), 孫慕堂 處訥(손모당 처눌), 郭槐軒 再謙(곽귀헌재겸),蔡投巖 夢硯(채투암 몽연), 朴摠管 忠後(박총관 충후), 李軍威 宗文(이군위 종문), 崔萬頃(최만경) 諸公(제공)과 뜻을 모아 義兵(의병)을 일으켜서 公事員(공사원)으로서 大將(대장)에 推戴(추대)되었다. 解顔倉(해안창) 占據倭兵(점거왜병)을 討伐(토벌)하여 倭首(왜수) 三名과 賊卒(적졸) 百餘給(백여급)을 (참괵)하였고, 漆谷 八(칠곡 팔거)에서 三戰三捷(삼전삼첩)의 戰功(전공)을 세웠고, 全羅道 長水(전라도 장수)에서 數千 倭兵을 물리쳐서 招諭使(초유사) 鶴峯 金誠一(학봉 김성일)과 體察使(체찰사) 漢陰 李德馨(한음 이덕형)에게 크게 奬許(장허)를 받았다. 亂靖後(난정후)에는 褒薦(포천)을 굳이 辭讓(사양)하고 山林에 돌아가서 한 讀書士(독서사)로서 大邱鄕校(대구향교)를 重建(중건)하고 各處(각처) 祠院(사원)을 補修(보수)하여 後進養成(후진양성)과 鄕學振興(향학진흥)에 힘을 다하였다. 愚伏 鄭經世(우복 정경세)先生은 本道 觀察使(본도 관찰사)로 와서 南來得一畏友(남래득일외우)라 하였고 忠翼公 李時發(충익공 이시발)은 斯文鼎新 扶植吾道(사문정신 부식오도)라 하였다. 宣祖 甲辰 二月二十七日에 卒하였다.

 

이 西溪書院이 이룩된 것은 正祖 五年 辛丑 西紀 一七八一年에 士林(사림)의 公議(공의)에 依하여 烏川(오천)先生 獨享(독향)으로 創設(창설)되었다가 二十年後인 純祖 元年 辛酉 西紀 一八0一年에 苔巖公(태암공)을 配享(배향)하였다.

 

創建以後(창건이후) 八十八年間을 士林(사림)과 姓孫(성손)들의 極盡(극진)한 誠意(성의)로 春秋奠享(춘추전향)과 講禮修學(강례수학)을 지키어왔으니 兩先生의 扶國扶敎(부국부교)의 精神(정신)이 이 南州一帶(남주일대)에 길이 남을 일이어늘 滄桑世劫(창상세겁)은 尊賢慕義(존현모의)도 持續(지속)하기 어려웠는지라 高宗戊辰 西紀 一八六八年에 書院毁撤令(서원훼철령)에 依하여 荒凉(황량)한 草原(초원)으로 廢墟(폐허)만이 남게 된 것이다. 姓孫(성손)들의 罔極(망극)과 士林(사림)들의 失意(실의)는 憤鬱(울분)의 情(정)을 참지 못한 것이 우금(于今)百二十年이라. 姓孫(성손)으로서나 士林(사림)으로서나 當然(당연)히 復元(복원)을 꽤할 일이었지만은, 事大力綿(사대역면)하여 爲先(위선) 이 돌을 세워서 遺蹟(유적)을 밝히고 復元事業(복원사업)은 앞으로 國家(국가)의 安定(안정)과 文敎(문교)의 再興(재흥)을 기다려서 이룩될 날이 있으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光復後 四十三年 丁卯秋 西紀 一九八七年

眞城后人 李壽洛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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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금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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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금계사 전경(金溪祠 : 전남 장흥군 부산면 유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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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 도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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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사(道川祠 : 경남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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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회관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2가 366-1 지상 5층 지하 1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