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명재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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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명재공(雙明齋公) 이인노(李仁老) 7世

 

(1) 이인로의 가문 및 생존연대

 

이인로의 가문은 인천이씨(仁川李氏)로서 고려조 3대 가문의 하나로 개국 때부터 대대로 높은 관직을 지내왔다. 그의 고조 자상(子祥)은 상서우복야에 중용되셨고, 증조 오(䫨)는 예종조에 평장사를 지내셨다. 그리고 조부 언림(彦林)은 의종조에 공부상서 우복야를, 부 백선(伯仙)은 명종조에 좌상시를 지내신분이다.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그의 가문을「나의 선조는 문장으로 세세에 이어와 홍지(紅紙)를 전해온 것이 이미 8장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인로는 의종6년(1152)에 태어나서 고종7년(1220)에 돌아가셨다. 부모를 조실한 후 숙부인 요일(蓼一)에게서 양육되었다. 당시 선조님의 숙부는 흥왕사 승통이자 화엄종장 이었다. 그의 초휘는 득옥(得玉)이고 자는 미수(眉叟)이며, 호는 쌍명재(雙明齋)이다. 이 외에도 청련(靑蓮)과 와도헌(臥陶軒)이라는 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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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명재 전경

경남 의령군 부림면 단원리

 

 

(2) 고려 조정에서의 활동

 

이인로는 고려 명종10년(1180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명종12년(1182년)에 금나라 하정사행에 서장관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곳 수도에 들어가서 정월 초하룻날 관문위에 다음과 같은 춘첩자(春帖子)를 써붙였다.

 

길가에 버들은 푸른 눈썹처럼 드리우고 (翠眉嬌展街頭柳)

고개위의 매화는 백설처럼 향기를 날리네 (白雲香飄嶺上梅)

천리길 고향은 편안히 있는줄 알겠거니 (千里家園知好在)

춘풍이 먼저 해동으로부터 불어오네 (春風先自海東來)

 

이글을 써 붙인지 얼마 안 되어 이름이 중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 뒤 중국의 학사들이 우리나라의 사신을 만나면 이 시를 외우면서 지금 그분이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는 가하고 물어 보기를 여러 번 하였다.

 

그 후 문극겸의 천거로 한림원과 고원에 보직되어 14년간 왕명을 부연하는 사소를 담당하였다. 최충헌 집정하의 신종 연간에는 고원에서 예부원외랑으로 천직되었고, 신종7년(1204년)에는 맹성수령에 임명되었다. 신종2년, 희종3년, 강종 2년 등 여러 번 최충헌의 집에 초대되어 당대의 문사 이규보(李奎報) 등과 더불어 시를 지었다. 또한 최당(崔讜)형제 중심의 기노회(耆老會)에 참석하여 시문을 지어서 문명을 드날렸다. 고종 초에는 비서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었으며 고종7년(1220년)에는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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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명재 본재실

경남 의령군 부림면 단원리

 

 

(3) 문인활동과 학문적 업적

 

한림원에 보임되어 조칙을 짓는 여가마다 시사를 짓되 막힘이 없었으므로 복고(腹藁)의 칭송을 들었다. 그 시대의 대표적인 문인들인 임춘, 오세재, 조통, 황보항, 함순, 이담지 등과 죽림고회(竹林高會)를 이루고 주도하였다. 이인로는 시창작의 대가로 은대집(銀臺集), 쌍명재집(雙明齋集), 파한집(破閑集), 서하선 생집(西河先生集)을 저술하였고 삼한시귀감, 동문선, 대동시선, 보한집 등에 많은 창작시가 실려 있다. 은대집에는 부(賦) 5수와 고율시(古律詩) 1500여수가 실려 있다.

 

특히 파한집은 그의 아들 세황이 기장현감으로 있을 때 그의 유고를 50년간 보관하다가 안렴사 태원왕공의 후원으로 원종원년에 파한집 3권을 간행하여 이후 800년간 전해오고 있는데 이는 고려사와 당시 학문과 사상을 연구하는데 있어 귀중한 국보급 시집이다. 또한 그는 한시론(漢詩論)의 대가로서 이규보의 신의론(新意論)에 대한 용사론(用事論)을 주창한 대학자였다.

 

그는 현대의 여러 학자와 교수들에 의하여 고려조의 학문과 사상을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문인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와 관련하여 최근 간행된 서적으로는 파한집 (破閑集, 유재영, 원광대 교수, 1978), 파한집(破閑集, 이상보, 국민대 교수, 1994), 파한집(破閑集, 전영진, 국문학 박사, 1995), 파한집(破閑集, 구인환, 서울대 교수, 2002), 서하집(西河集, 진성규, 중앙대 교수, 1984), 미수 이인로 시집(眉叟 李仁老 詩集, 김진영, 경희대 교수, 1998), 한국한시사(韓國漢詩史, 민병수, 서울대 교수, 1997), 한국명가한시선(韓國名家漢詩選, 송준호, 연세대 교수, 1999), 한국한시작가연구(韓國漢詩作家硏究, 한국한시학회, 1995) 등이 있다.

 

이중에서 경희대학교 김진영 박사가 저술한 「미수 이인로 시집」에서 평가한 그의 학문적 업적을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그의 시작품을 읽어 보면 절차탁마의 묘가 뛰어난 작품, 색조와 공간의 대조가 휼륭하게 영상화된 작품, 시어의 반복을 통해 새로운 의미의 생성을 기막히게 창출한 작품, 무엇보다도 풍부한 전고를 활용하여 다양한 편폭의 의미를 담고 있는 작품이 많다. 결론적으로 그는 우리 한시의 시론과 시 창작에 특출한 재능을 보인 고려조를 대표하는 관료 겸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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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명재 紅桃門

경남 의령군 부림면 단원리

 

 

(4) 친구, 아들과 문학비

 

그에게는 4명의 절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시를 함께 겨룰만한 친구로 임춘, 산수를 함께 즐길만한 친구로 조역락, 술을 함께 즐길만한 친구로 이담지, 그리고 승려친구인 종형이 있었다고 파한집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아들 6형제를 두셨는데 첫째 아들(程)은 문과에 4등으로, 둘째 아들(穰)은 문과에 3등으로, 셋째 아들(榲)은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다섯째 아들(世黃)은 기장현감을, 여섯째 아들(阿大)은 진동현감을 지낸 것으로 파한집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직계손인 극명(克明)은 조선조에서 보문각 대제학 공조판서를 지냈다.

 

최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인 100인이 이인로의 높은 학문과 큰 뜻을 기리기 위하여『쌍명재 이인로 문학비』를 2001년에 인천시 연수구 연수동에 위치한 인천이씨 시조공을 모시는 원인재 앞에 건립하였다. 그 시비에는 이인로의 대표적인 시인 산거(山居)가 새겨져 있다.

 

봄은 갔건만 꽃은 그대로 있고 (春去花猶在)

하늘은 맑건만 골짝은 그늘졌네 (天晴谷自陰)

한낮인데도 두견이 슬피우니 (杜鵑啼白晝)

비로소 사는곳이 깊음을 알겠네 (始覺卜居深)

 

쌍명재 이인로의 재실은 현재 경남 의령군 부림면 단원리에 있으며 매년 양력 4월 초순에 인천이씨 쌍명재공 종친회 주관으로 춘향대제를 거행하고 있다. 또한 2007년 10월에는 경기도 파주시 고려통일대전(高麗統一大殿)에 고려조를 대표하는 대학자로서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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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명재 춘향대제 장면

경남 의령군 부림면 단원리

 

 

쌍명재 이인로선생문학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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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로李仁老 선생은 인천인仁川人으로 자는 미수眉 요 호는 쌍명재雙明齋이시니 누대에 걸친 왕가의 외척外戚으로 부동의 문벌을 형성했던 경원慶源(현인천)이씨의 시조이신 이허겸李許謙의 7세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오 의 증손이요 언림彦林의 손자이시다. 고려高麗 의종 6년(1152)에 아버지 백선伯仙에게서 나시어 고중 7년(1220)까지 사신 시詩와 문장文章이 뛰어난 문신文臣이시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시어 시재詩才에 뛰어나셨으나 무신란 때 불문佛門에 귀의했다가 환속하여 25세 때 태학太學에 들어가셔서 육경을 두루 학습하신 뒤 29세 때 진사과에 장원급제하시고 31세 때에 최영유崔永濡의 서장관이 되시어 금金나라에 다녀오신 후 계양현桂陽縣(현부천) 관기官記를 거쳐서 한림원翰林院에 보임 되시어 조칙詔勅을 짓는 일을 맡아 하시면서 여가때마다 시사詩詞를 짓되 막힘이 없으셨으므로 복고腹藁의 칭송을 들으셨으며 당대의 명 문장가였던 임춘林椿 오세재吳世才 등과 죽림고회竹林高會를 이루시어 새로운 문풍을 일으키셨다. 벼슬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비서감秘書監과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및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역임하시고 향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의 저술로는 은대집銀臺集과 쌍명재집雙明齋集과 파한집破閑集이 있었으나 현재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화집詩話集인 파한집만이 전해오며 그 외의 시문들은 각종 문헌에 편편히 전해지고 있어 이를 통하여 선생의 훌륭한 문학적 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고려 때의 무신정권武臣政權하에서 문학적 전통을 살려내신 선생의 공로는 후학들에게 큰 귀감이 될 수 있으므로 온 나라의 선비들이 정성을 모아 선생의 선조 허겸의 묘원인 원인재源仁齋 옆에 문학비를 세워 선생의 선비정신과 문학적 공적을 높이 기리고자 한다.

 

2001년  4월  5일

인천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우쾌제  삼가 짓고

서예가  정충락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