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공 소성후 신도비문

시조공 소성후 신도비(始祖公 邵城侯 神道碑)


1. 신도비 사진

 

icleeor6_01-2.jpg

소재지 : 인천광역시 연수구 경원대로 322 원인재

 

2. 신도비 비문

icleeor6_01.jpg

 

 

「해 석 문」

 

고려국증상서좌복야상주국소성현개국후인천이공허겸신도비명병서

 

나는 일찍이 말하기를 「한 씨족의 시조(始祖)가 되어 이어갈 수 있는 위업(偉業)을 창조(創造)하고 확고한 터전을 수립하여 무궁한 후손(後孫)으로 유구(悠久)한 세월에 걸쳐 하늘과 신(神)의 보호(保護)를 받음과도 같게 되기는 그 누가 시켜서 그러한 것인가」하였는데 급기야는 많은 세고(世故)를 겪으면서 고금(古今)의 사람들을 가늠해 보니 거의가 가정이나 국가를 위해 자기의 할 수 있는 힘을 다하는 자가 없음으로 덧없는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순식간에 순환반복(循環反覆)함을 알게 되었다 나는 두려운 듯이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나」?

 

아! 천지(天地)는 유구하다 빗방울처럼 많은 사람들은 의의(意義)없이 왔다가 근거(根據)없이 가게 되니 풍연(風烟)과 같이 모였다 흩어지고 초수(草樹)와 같이 썪어 없어질 뿐이다 그러한 와중에서 풍성하고도 위대(偉大)한 훈업(勳業)으로서 국가의 틀이 되어 임금이 토지와 성씨(姓氏)를 내려주며 작(爵)을 봉(封)하고 종(宗)을 세울 정도인 사람은 아마도 천(千) 백(百)명 가운데서 하나 둘도 채 못될 것이다 천 백분의 일 이 밖에 안 되는 사람으로서 훌륭한 문벌(門閥)을 보유하여 누 백대(屢百代)에 전해지고 몇 만호(萬戶)로 헤아려서 여타(餘他)사람들의 흠모(欽慕)대상이 되기에는 반드시 풍부(豊富)한 수양(修養)과 누적(累積)된 덕망(德望)의 토대(土臺)에서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된 것이다

 

을해년(乙亥年 : 1995) 가을에 인천이씨대종회장(仁川李氏大宗會長) 남호(南浩)씨가 첨종(僉宗)의 결의에 따라 보첩(譜牒)과 소성세덕(邵域世德) 등 모든 문헌(文獻)을 가지고 공주(公州)의 청유당(靑儒堂)으로 나를 찾아와 시조(始祖)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요청했다 일 년이 지나도록 글이 이뤄지지 못했으니 겨를을 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불감(不敢)했기 때문이었는데 끊임없는 요청에 삼가 붓을 들게 되었다 구보(舊譜)를 살피건대 공(公)의 휘(諱)는 허겸(許謙)이니 실로 인천이씨의 일세조(一世祖)가 된다 인천이씨는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에서 비롯되었는데 왕이 허씨 휘 황옥(許氏 諱 黃玉)으로 왕후(王后)를 삼아 십 형제(十 兄弟)의 아들을 두었더니 돌아감에 미처 왕은 심히 애도(哀悼)하고 또한 후(后)의 말씀에 감동하여 두 아들에게 모성(母姓)을 따르게 하니 김씨(金氏)로서 허씨(許氏)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가록(家錄)을 살피건대 휘 기(諱 奇)는 수로왕(首露王)의 후손(後孫)으로서 신라 경덕왕(新羅 景德王) 때 벼슬은 병마사대광(兵馬使大匡)에 이르렀고 당(唐)나라 현종(玄宗) 천보 14년 을미년(天寶十四年乙未年 : 755) 겨울에 안록산(安祿山)의 난리가 일어나자 이듬해 이월(二月)에 사신(使臣)의 명을 받들고 파촉(巴蜀)에 이르니 당제(唐帝)는 노고(勞苦)를 가상(嘉尙)히 여겨 오언고시일편(五言古詩一篇)을 기증하여 인중(引重)과 권연(眷戀)의 뜻을 전하고 다음 해 정유년(丁酉年)에 당제(唐帝)를 따라 환도(還都)하자 황제(皇帝)의 성 이씨(姓 李氏)를 내려주고 소성백(邵城伯)을 봉(封)하니 허씨(許氏)에서 다시 이씨(李氏)가 되었으며 혹은 이 허 복성(李 許 複姓)으로 일컬어지기도 했으나 그 후 실계(失系) 하였다. 문정공(文正公) 휘(諱) 지저(之氐)께서 지은 아버지 문충공(文忠公) 휘(諱) 공수(公壽)의 지문(誌文)을 참고로 한다면 소성백(邵城伯) 휘(諱) 기(奇)를 십삼대조(十三代祖)라 칭(稱)하였으니 문충공(文忠公)은 공(公)에게 현손(玄孫)이 되며 소성백(邵城伯)은 공(公)에게 구대조(九代祖)가 된다 가록(家錄)에는 기(奇) 검(儉) 파(波) 귀(貴) 준(浚)으로서 공(公) 이상의 계대(系代)를 대고 오대(五代) 모두가 독자(獨子)로 되었으며 그대로라면 소성백(邵城伯)은 公에게 오대조(五代祖)가 된다 임술보(壬戌譜) 및 소성세덕(邵城世德)에는 모두 소성백(邵城伯)과의 구대(九代)로 기록되었으니 위 지문(誌文)의 기록과 대수(代數)는 일치(一致)가 되나 휘자(諱字)나 사실(事實)에 대하여는 문헌(文獻)을 증거(證據)할 수 없으니 차라리 구보(舊譜)에선 다른 기록과 달리 공(公)을 일세(一世)로 단정(斷定)한 것이며 역시 의문되는 것을 제쳐놓고 신중(愼重)을 기하는 도리(道理)인가보다

 

아! 무성「武成 : 서경(書經)의 편명(篇名)」은 성경(聖經)임에도 맹자(孟子)께선 그중에서 몇몇 부분만을 취택(取擇)한다 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러한 의미에서 공(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가늠한다면 거의 근거없다는 말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공(公)은 신라말(新羅末)에 탄생(誕生)하고 고려조(高麗朝)에서 벼슬하여 대관(大官)을 지내고 소성백(邵城伯)에 습봉(襲封)되고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尙書左僕射 上柱國 邵城縣 開國侯)의 벼슬에 증직(贈職)되고 식읍 일천오백호(食邑 一千五百戶)를 하사(下賜)받았다 생졸년월(生卒年月)과 관계이력(官階履歷)은 기록이 없고 묘(墓)는 인천(仁川) 문학산(文鶴山) 아래 간치도(看雉島) 신좌(辛坐)의 자리에 있으니 풍수가(風水家)에선 거북의 형(形)이라고 말한다 배(配)는 경주김씨(慶州金氏)니 아버지는 공부시랑 낙랑군 은열(工部侍郞 樂浪君 殷說)이요 할아버지는 경순왕(敬順王)이며 묘(墓)는 공(公)과 합폄(合窆)이다

 

그 후 후손(後孫)들이 크게 번창(繁昌)하여 본 고을이 현(縣)에서 군(郡) 군(郡)에서 부(府)로 승격(昇格)되기까지에는 모두가 인천이씨(仁川李氏)와의 관계가 없지 않으며 비록 보통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이 묘(墓)가 명묘(名墓)임을 알게 되어 가르키며 흠모하고 제사(祭祀)가 지금까지 이어지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장자(長子) 한(翰)은 중추부사(中樞副使)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증직(贈職)되고 시호(諡)는 문경(文景)이요 이자(二子) 눌(訥)은 대장군(大將軍)이요. 삼자(三子) 진(瑱)은 우복야(右僕射)이고 여(女)는 안산 김은부(安山 金殷傅)에게 출가(出嫁)하니 지중추 호부상서 중추사(知中樞 戶部尙書 中樞使)로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주국 안산국 개국후(上柱國 安山國 開國侯)에 증직되었다 장방손(長房孫) 자연(子淵)은 추성좌세보사공신 문하시중 상주국 경원군 개국공(推誠佐世保社功臣 門下侍中 上柱國 慶源郡 開國公)이며 식읍(食邑) 삼천호(三千戶)를 하사(下賜)받고 문종묘정(文宗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다음 자상(子祥)은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세 임금을 섬겨 충의(忠義)가 당당(堂堂)하고 아들 손자 모두가 재상(宰相)의 자리에 오르니 어느 사람은 시(詩)를 지어 축하하기를 「뜰아래 지란(芝蘭)은 세 재상(宰相)이요. 문 앞에 도리(桃李)는 열 공경(公卿)이라」하였다 이방손(二房孫) 성간(成幹)은 상장군 검교태자소보(上將軍 檢校太子小保)요 삼방손(三房孫) 총현(聰顯)은 예부상서(禮部尙書)이다 증손(曾孫)이하 부터는 가장 현달(顯達)한 분만을 열거(列擧)하고 내외(內外) 원근손(遠近孫)에서 왕비(王妃)의 지친(至親) 및 여서(女壻) 몇몇 분을 별도로 채입(採入)하니 고례(古例)에 없지만 비상(非常)한 사람은 사적(事蹟)이 비상(非常)함으로 문자(文字)도 상례(常例)만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자연(子淵)의 팔남(八男)에 정(頲)은 수태부 진 태사시중 경원백(守太傅 進 太師侍中 慶源伯) 시호(諡)는 정헌(貞憲)이며 적(頔)은 전중소감(殿中少監)이요 석(碩)은 병부시랑 동북면병마사 공부상서(兵部侍郞 東北面兵馬使 工部尙書)요 의(顗)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요 소현(韶顯)은 집을 떠나 불문(佛門)에 들어가니 탑호(塔號)는 진응(眞應)이요 시호(諡)는 혜덕왕사(惠德王師)이다 호(顥)는 문하시랑평장사 수태부 경원백(門下侍郞平章事 守太傅 慶源伯)이며 시호(諡)는 경덕(景德)이다 전(顓)은 증문하시랑평장사 수태부(贈門下侍郞平章事 守太傅)요 안(顔)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이며 시호(諡)는 양신(襄愼)이다 예(預)는 여섯 임금을 섬겨 한림학사 정당문학 진중서시랑평장사(翰林學士 政堂文學 進中書侍郞平章事)이며 시호(諡)는 문현(文顯)이다 오(䫨)는 호(號) 금강거사(金剛居士)이며 문덕전태학사 판상서이부사 감수국사 문하시랑평장사(文德殿太學士 判尙書吏部事 監修國史 門下侍郞平章事)요 시호(諡)는 문양(文良)이니 곧 자상(子祥)의 이남(二男)이다 자인(資仁)은 병부시랑 우간의대부 상서좌승 중추원부사(兵部侍郞 右諫議大夫 尙書左丞 中樞院副使)요 자의(資義)는 중추원사(中樞院事)이며 선종조(宣宗朝) 때 송(宋)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남다른 명성(名聲)과 칭송이 있었다 자현(資玄)은 호(號) 식암(息菴) 또는 희이(希夷) 시호(諡)는 진락(眞樂)이니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대악서승(大樂署丞)이 되었다가 벼슬을 버리고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서 채식(菜食)과 포의(布衣)로 도(道)를 즐거워 하면서 평생을 마치니 퇴계선생(退溪先生)은 시(詩)에다 서문(序文)을 곁드려 그의 청수고절(淸修苦節)을 특별히 칭송했다 자덕(資德)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이며 시호(諡)는 장의(莊懿)이다 자겸(資謙)은 문하시중 중서령 조선국공(門下侍中 中書令 朝鮮國公)이요 자양(資諒)은 수사공 중서시랑평장사(守司空 中書侍郞平章事)요 공수(公壽)의 자(字)는 원로(元老)요 시호(諡)는 문충(文忠)이며 천품(天稟)이 굉후(宏厚)하니 아이 때 외조(外祖) 최문화공 유선(崔文和公 惟善)은 그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마땅히 큰 그릇이 될 것이라」 하더니 성장(成長)하자 학문에 힘쓰고 대과(大科)에 급제(及第)하여 추충위사 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문하시중 상주국(推忠衛社 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門下侍中 上柱國)이요 언림(彦林)은 공부상서 우복야(工部尙書 右僕射)요 식(軾)은 금자광록대부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상서호부사(金紫光祿大夫 尙書左僕射 參知政事 判尙書戶部事)요 지저(之氐)는 즉 문정공(文正公)이니 정당문학 수사공 좌복야 판서경유수사(政堂文學 守司空 左僕射 判西京留守事)이며 직절(直節)이 있고 문장(文章)에 능(能)하여 일찍이 임금을 모시고 평양(平壤 : 西都)에 갔다가 시(詩)를 지어 한 세상에 알려졌더니 조선 세조조(世祖朝)에 이르러 악부(樂府)에 채입(採入)되었다 지무(之茂)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요 광진(光縉)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요 시호(諡)는 정의(貞懿)이다 인로(仁老)는 호(號) 쌍명재(雙明齋)이니 문장으로 세상에 울렸고 명종조(明宗朝)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서장관(書狀官)의 직책으로서 송(宋)나라에 갔다가 주자(朱子)를 뵙고 학문의 요령을 배우니 저술(著述)에는 은대(銀臺), 쌍명(雙明), 파한(破閑)등 세 문집(文集)이 간행(刊行)되어 퍼졌다 장용(藏用)은 정당문학 중서시랑평장사 태자태부 문하시중(政堂文學 中書侍郞平章事 太子太傅 門下侍中)이요 시호(諡)는 문진(文眞)이니 문장(文章)이 뛰어나서 한 시대의 큰 글이 그 솜씨에서 많이 나왔다 원종(元宗) 갑자년(甲子年)에 왕을 따라 원(元)나라에 가니 이때 원 나라에선 고려에게 구원병(救援兵)을 요청했다 끊임없는 긴박한 상황에도 공(公)은 응대에 민첩(敏捷)하므로 사태는 마침내 풀렸고 원제(元帝)는 친히 두 차례의 잔치를 베풀었다 작신(作臣)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니 요승(妖僧)을 물리치다가 쫓겨남을 당했다 온(榲)은 호(號) 영모재(永慕齋)요 벼슬은 중현대부 전의감(中顯大夫典醫監)이니 정포은(鄭圃隱) 이석탄(李石灘) 이둔촌(李遁村) 제현(諸賢)과 더불어 친밀했고 성품이 순효(純孝)하여 쌀궤의 감응(感應)이 있으니 사실이 알려지자 국왕(國王)은 안렴사(按廉使)를 보내어 두 비석(碑石)을 세워 표창했다 원굉(元紘)은 과거에 급제하고 시(詩)를 잘 지었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歷任)했다 고려가 멸망하자 충절(忠節)로서 인천(仁川)에 유배(流配)되어 유명한 희청(喜晴) 및 신정(新亭)이라는 제목의 시(詩)를 지으니 권양촌(權陽村)의 문집(文集)에 실려 있다 그의 두 아들에 약(瀹)은 감정(監正)이니 이태조(李太祖)가 혁명을 하자 신복(臣僕)이 아니되겠다는 의리를 지켰으며 관(灌)은 문과에 급제하여 태종조(太宗朝)에 경기(京畿) 함경(咸鏡) 두 도(道) 감사(監司)를 역임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승진되었다 현좌(賢佐)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경성부원군(慶城府院君)이요 만영(萬英)은 인천군(仁川君)이고 문화(文和)는 호(號) 오천(烏川)이니 척불숭유(斥佛崇儒)하고 좌참찬 의정부사겸예문관대제학(左叅贊議政府事兼藝文館大提學)을 역임(歷任)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되고 시호(諡)는 공도(恭度)이며 육남(六男)을 낳으니 모두가 경재상(卿宰相)의 자리에 올랐다

 

역대(歷代)의 왕비(王妃)를 열거한다면 원성태후(元成太后) 원혜태후(元惠太后) 원평왕비(元平王妃)는 곧 김은부(金殷傅)의 세 따님이며 공(公)에게 외손(外孫)이 된다  인예태후(仁睿太后) 및 인경(仁敬) 인절(仁節) 두 왕비는 자연(子淵)의 따님이며 공(公)에게 사세(四世)가 된다 원신왕후(元信王后)는 정(頲)의 따님이요 사숙태후(思肅太后)는 석(碩)의 따님이요 장경왕비(長慶王妃)는 호(顥)의 따님이요 정신왕비(貞信王妃)는 예(預)의 따님이며 그의 따님이 경화왕비(敬和王妃)가 되었으니 공(公)에게 오 육세(五 六世)가 된다 문경태후(文敬太后) 연덕왕비(延德王妃) 복창왕비(福昌王妃)는 자겸(資謙)의 세 따님이며 공에게 육세(六世)가 되고 공양세자빈(恭讓世子嬪)은 원굉(元紘)의 따님이며 공(公)에게 십삼세(十三世)가 된다 조선조(朝鮮朝)에 이르러 파평(坡平) 윤번(尹璠)의 따님이 정희왕후(貞熹王后)가 되었으니 공도공(恭度公)의 외손(外孫)이며 공(公)에게 십육세(十六世)가 된다 사위로서 현달(顯達)하여 시조(始祖) 또는 중현조(中顯祖)가 된 분을 열거한다면 파평(坡平) 윤관(尹瓘)은 문하시중 판상서 영평현 개국백(門下侍中 判尙書 鈴平縣 開國伯)이요 시호(諡)는 문숙(文肅)이니 성간(成幹)의 사위요 광산(光山) 김의원(金義元)은 검교태자태사 호부상서겸삼사사(檢校太子太師 戶部尙書兼三司使)로 특진금자광록대부(特進金紫光祿大夫)이며 시호(諡)는 충정(忠貞)이니 석(碩)의 사위요 남평(南平) 문공원(文公元)은 평장사(平章事)요 시호(諡)는 정경(貞敬)이니 의(顗)의 사위요 강릉(江凌) 김인존(金仁存)은 검교태사 문하시중(檢校太師 門下侍中)이요 시호(諡)는 문성(文成)이니 호(顥)의 사위이다 그 밖에 세대가 멀어지고 분파자손(分派子孫)이 더욱 번창함에 따라 과거(科擧) 사환(仕宦) 충효(忠孝) 덕학(德學)으로서 훌륭한 명망(名望)이 있는 분들도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시경(詩經)에 이르지 않았던가 「산악(山嶽)이 신(神)을 내려 보(甫)와 신(申)〈보(甫) : 보후(甫侯) 신(申) : 신백(申伯) 주선왕(周宣王)의 현신(賢臣)〉을 낳았다」라고 하였다 고려가 일어나던 초기에 공(公)이 운(運)에 맞춰 태어나서 위대(偉大)한 공덕과 훌륭한 계획을 자신에 간직하고 후손에게 전수하여 대대로 경재상(卿宰相)의 국록(國祿)을 받게 되고 연달아 나온 현숙(賢淑)한 여인(女人)은 만민(萬民)의 국모(國母)가 되어 어엿이 종묘(宗廟)의 신주(神主)가 되고 사직(社稷)의 본부(本府)가 되었으니 실로 동방(東方)의 역사에서 없었던 일이라 하겠다 아! 거룩하도다

 

일찍기 왜정(倭政)때에 산소(山所)의 부근(附近)이 농토(農土)로 조성(造成)되었고 광복후(光復後)에 정부계획(政府計劃)으로 도시가 됨에 언덕과 골짝의 변천은 아침 저녁으로 바뀌었으니 아! 상전벽해(桑田碧海)라 아니할 수 없도다

이제 그의 후손들이 동심협모(同心協謀)하여 당국(當局)의 인허(認許)를 받아 묘역(墓域)을 정화(淨化)하고 또 다시 거금(巨金)을 갹출(醵出)하는데 먼 시조(始祖)라서 소홀하고 빠진 사람이 없었다 재실의 몸채와 행랑채 모든 부속건물을 증축이건(增築移建)하고 낙성식(落成式)을 하자 큰 비석(碑石)으로 묘(墓)를 장식하니 아! 이제와 같은 혼란(混亂)한 세상에 어버이를 버리고 선조(先祖)를 망각(忘却)하는 흐름을 걷잡을 수 없는데 이처럼 거룩한 일 어찌 쉽사리 도모(圖謀)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인천이씨(仁川李氏) 장래의 흥운(興運)을 볼 수 있으며 위에서 이른바 무궁한 후손으로 몇 백대에 전해진다는 나의 말이 착오되지 아니함을 새삼 다행으로 여겨진다 이로서 명(銘)에 가름하니 명(銘)에 이르되

   인천이씨는 수로왕(首路王)에서 나왔어라  

   그 누가 임금의 배우자였나!  

   휘 황옥(諱 黃玉)이신 허씨 왕후로세

   왕후께선 왕의 마음 감동시키니

   두 아들 모성(母姓)따라 허씨 되었군

   아찬(阿飱)벼슬을 한 휘 기(諱 奇)는

   당나라 천보(天寶)년에 사신으로 가서

   파촉(巴蜀)에서 황제(皇帝)를 뵈오니

   안록산(安祿山)을 토벌키 위해서였지

   황성(皇姓)의 이씨(李氏)를 하사(下賜)하니

   황제의 마음 역시 감동되었도다

   기송(杞宋)의 문헌 증거 없음은

   공자(孔子)도 마냥 개탄하셨네  

   공(公)이 탄생하자 고려가 흥왕하였으니

   이 모두 하늘이 도와주신 거야

   소성현(邵城縣)에 봉(封)하고

   식읍(食邑)의 민호(民戶)를 하사하였지

   공(公)이 일세조(一世祖)가 된 사실

   구보(舊譜)에 환하게 나타났도다

   내외(內外) 후손들 벼슬길 높이 뛰어

   당(堂)에 가득히 관복(官服) 빛나니

   그 누가 공경대부(公卿大夫) 적임이 아니런가  

   빼어난 현원(賢媛) 십수명(十數名)의 국모(國母)로다

   아! 공(公)의 음덕(蔭德)이 감쌋기 때문이겠지

   수목(樹木) 우거진 산소 저 바닷가에 위치하였네

   기왕의 백세(百世)와 미래의 만대(萬代)에

   무궁한 발상(發祥)으로 하늘의 복(福) 받으리로다

   내가 쓴 비문(碑文) 그 내용 거짓 아니로세

 

세 병자년 유화절(歲 丙子年 流火節 : 1996년 음력 7월)  

월성(月城)  이종락(李鍾洛) 찬(撰)

 

 

※ 시조공(始祖公)의 신도비석(神道碑石)과 해석문판석(解釋文板石)에 새겨진 비문(碑文)을 직접 대조 확인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다만, 이해하기 쉽도록 신도비문은 한자음을 병기(倂記)하고 해석문 판석글은 한글로 쓰되  필요한 경우에는 한자를 (  )안에 기록하였습니다.

 2021년 8월 27일

대종회 상임부회장 이 진 옥 대조확인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