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명재 이인로의 가계 및 호

 쌍명재 이인로의 가계

 

2021년은 쌍명재공 이인로(李仁老) 서거 801년이 되는 해이다. 이인로의 가계(家系)에 대하여 소개한다.

 

첫째, 이인로의 공식직함

파한집 원문에는 좌간의대부 비서감 보문각학사 지제고 이인로(左諫議大夫 秘書監 寶文閣學士 知制誥 李仁老)로 기록하고 있다. 먼저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는 중서문하성의 정4품직으로 군왕의 과실에 대하여 간언하거나 부당한 처사나 조칙을 바로 잡는 기능 등을 맡았다. 비서감(秘書監)은 경적(經籍)과 축소문(祝疏文)을 관장하던 비서성의 종3품직으로 이인로는 고종 초에 비서감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는 중요문서와 전적(典籍)을 보관하던 보문각의 종3품 대우를 받던 관직이었으며, 지제고(知制誥)는 왕언(王言)을 대신하여 짓는 임무를 맡은 관직이다(파한집 역주, 2013. 1. 9,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따라서 누구나 앞으로 이인로의 공식 직함은 파한집의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둘째, 이인로의 아들들

가장 오래된 인천이씨 족보(肅宗, 甲戌 1694년)에는 할아버지는 아들 삼형제를 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은 정유보(正祖 丁酉 1777년), 을축보(純祖 乙丑 1805년) 그리고 계묘보(癸卯 1963년)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가 발행한 파한집역주(2013. 1. 9)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려사(高麗史) 이인로전(李仁老傳)에 의하면 그의 아들로는 정(程), 양(穰), 온(禾昷)의 세 명이 전할 뿐이고 세황(世黃)은 없다. 씨족원류(氏族原流)에는 고려사에 전하는 세 아들과 함께 얼자 세황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세황은 세 아들 중 한명의 이명이거나 고려사에 없는 다른 아들이었을 것이다>

 

또한 파한집에는「神王七年 僕出守孟城 兒子阿大赴官珎洞」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즉 신종 7년에 내가 맹성의 수령으로 나갔을 때 아들 아대가 진동으로 부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대하여도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의 파한집역주에는「아대(阿大)라는 이름으로 보아 첫째인 정(程)일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인천이씨 대동보(2004. 12)에는 세황은 이인로의 다섯째 아드님으로, 아대는 여섯째 아드님으로 등재되어 있다.

 

셋째, 파한집 발문을 쓴 얼자 세황

파한집(破閑集)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인 경신년(1260년)에 판각되어 발문이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발문 말미에「庚申三月日孽子閣門祗候世黃謹誌」라고 쓰여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하여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서가 발행한 파한집 역주(2013. 1. 9)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얼자(孽子)의 사전 상 의미는 정실부인이 아닌 천첩소생의 아들이다. 하지만 재난을 만난 아들을 가르키기도 한다. 고려사회에서의 서얼은 부거권(赴擧權)은 주어지지만 국학에의 입학은 허락되지 않았으며, 급제하여도 한직(限職)이나 한품(限品)의 적용을 받았다. 여기서는 얼자가 신분상의 의미나 겸양의 의미중 하나로 사용되었을 것인데, 이세황이 한직의 계선을 넘어 참직(叅職)인 각문지후(閣門祗候)에 재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역주본에서는「경신년 3월 일에 못난 아들 각문지후 세황이 삼가 짓다」로 번역하였다. 인천이씨 문중에서는 이를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해석이라고 동의한다.

  

넷째, 이인로의 상계

이인로의 조부이신 언림(彦林)은 의종조 공부상서우복야(工部尙書右僕射)를 지내신 인천이씨 5세손이시다. 그는 광진(光瑨), 요일(寥一), 백선(伯仙)의 세 아들을 두셨는데, 파한집 발문에서 세황은 이인로의 성장 배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대금 천덕 4년 임신에 태어나셔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곳이 없었는데 대숙인 화엄승통 요일께서 아버지를 길러주셨다. 항상 좌우에서 떨어지지 않고 배우기를 열심히 하여 삼분 오전 제자백가를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대숙인 요일(寥一)에 대하여 파한집에서「明皇時 大叔僧統寥一出入禁宇間 不問左右二十餘年」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즉 명종 때에 이인로의 대숙인 승통 요일이 대궐을 드나드는 동안 좌우에 정사를 묻지 않은 것이 20여년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승통(僧統)이란 교종계통의 승계(僧階) 중 가장 높은 것으로 선종계통의 대선사(大禪師)에 해당한다. 광종 대 무렵 승계가 정비된 이후에는 대체로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승통, 대선사에서 임명되었다.

 

실제로 이인로는 무신정변의 와중에 요일 대숙 밑에서 승려가 되어 몸을 피한바 있었다. 대숙 요일은 명종 27년(1197년)에 흥왕사에 가려던 최충헌을 제거하려 한다는 혐의로 유배된 듯하며 고령에서 반룡사를 창건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이인로는 반룡사에 상당기간 머물러 계신 것으로 보이며 이곳에서 유명한 산거(山居)라는 시를 남기셨다.

 

다음에는 이인로의 첫째 대숙 광진(光瑨)에 대하여 알아본다. 그는 공부낭중(工部郎中), 시병부상서(試兵部尙書), 참지정사(參知政事),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등을 역임하셨다. 파한집에서「의종 말년에 상국 이광진은 겸손하고 근신하여 환난을 당하지 않았다」고 서술되어 있다. 또한 파한집 역주에는「그는 성품이 온순하고 근신하여 무신란으로 많은 문신들이 주살되었을 때에도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한편 대숙 광진은 유인(惟仁), 유의(惟誼), 유직(惟直), 유양(惟諒), 유경(惟卿), 유온(惟溫)의 아들 6형제를 두셨다. 특히 파한집에서 넷째 아들인 유경에 대하여「堂弟尙書惟卿相門子 少以風流自命」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즉 당제 상서 유경은 재상가문의 자손으로 젊어서부터 풍류를 자처했다는 것이다. 유경의 관직에 대하여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파한집역주, 2013. 1. 9 발행)에서는 이규보가 지은 제문에 태부경(太府卿)으로 되어 있으며 나중에 상서(尙書)로 추증된 것으로 본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광진의 아들 6형제(인천이씨 7세손)까지는 인천이씨 대동보에 올라있으나 그로부터 후세는 흥양이씨(興陽李氏)로 분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흥양이씨 홈페이지에는 흥양이씨의 시조는 국자생원 이언림(李彦林)이다. 그는 의종 3년(1149년) 병부상서와 공부상서를 거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지낸 후 흥양에 정착 세거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흥양이씨의 가계도에는 시조 이언림에서 그 아들인 광진은 없어지고 바로 손자인 유효(惟孝)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인천이씨 대동보에는 광진의 아들 중에 유효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섯째, 당형 최상국에 관한 기록

파한집에「두류산에 아득히 저녁 구름 깔리니」라고 시작하는 시에는 예전에 나와 당형 최상국(堂兄 崔相國)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둔하려는 뜻이 있어 서로 약속하고 이 마을(청학동)을 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당형 최상국에 대하여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에서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고려에서는 본족의 당형제는 백숙부의 아들뿐만 아니라 고모의 아들까지 포함하는데 현재 이인로의 친족관계 등을 알려주는 자료가 없어 당형인 최상국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단지 이인로가 최영유(崔永濡)의 딸과 혼인했으므로 처족 중의 한 사람일 수도 있다. 한편 최상국을 최유청(崔惟淸)으로 추측한바 있는데 이인로의 연령을 감안하면 최유청의 아들로 재상을 지낸 최당(崔讜), 최선(崔詵) 형제 중 한 사람일 것이다>

 

 

 쌍명재 이인로의 호

 

1. 이인로(李仁老)의 호

이인로의 호는 와도헌 뿐만 아니고 몇 개가 더 있다. 이인로의 초휘는 득옥(得玉)이고 자는 미수(眉叟)이고, 호는 쌍명재(雙明齎), 청련(靑蓮), 와도헌(臥陶軒)이다. 이중 우리나라 현대의 저명한 학자, 교수 등 석학, 후학 및 후손들 대부분은 쌍명재로 부르고 있다.

 

2. 쌍명재 이인로의 별칭 근원

가. 이인로를 쌍명재로 부르게 된 연유

명종 때 정월 대보름밤 이인로가 옥당에 입시했을 때 명종은 한림원에 명하여 등룡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 이인로는 등룡시(---------, ---------, 須知一片丹心在, 欲助重瞳日月明)를 지어 올렸다. 이 시에 대하여 임금께서 크게 칭찬하고 상을 주셨고, 일월명(日月明)의 뜻을 취하여 쌍명(雙明)의 호를 내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인천이씨 문중에서는 이인로에게는 쌍명재라는 별칭이 생겼다고 전해오고 있다.

 

나. 이인로는 쌍명재집

이인로는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에 참여하여 회원들과 지은 시문 100여수를 모아 엮어 쌍명재집(雙明齋集)을 발간하였다. 이 시집은 전 3권으로 되어 있으며, 고려조의 높은 수준의 시문학 서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 쌍명재집의 저자로 유명해져 후학과 후손들은 자연스럽게 이인로를 쌍명재로 호칭하고 있다.

 

3. 죽림고회(竹林高會)의 후손들과 쌍명재 이인로

가. 죽림고회 후손들에 의한 호칭

이인로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문인들인 임춘, 오세재, 조통, 황보항, 함순, 이담지 등과 죽림고회를 이루고 주도하였다. 이인로는 인천이씨 쌍명재공파 파시조, 이담지는 인천이씨 선대조, 임춘은 예천임씨 선대조, 오세재는 고창오씨 선대조이다.

고려시대 이인로가 주도한 죽림고회 회원 8명 중 4명이 속해있는 3개 문중(인천이씨, 예천임씨, 고창오씨)의 후손들은 죽림고회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아 8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문중 간에 우의 깊은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특히 2003년 4월 쌍명재 이인로의 춘향시제가 경남 의령군 부림면 단원리 쌍명재에서 봉행되었다. 이 자리에 예천임씨 문중에서는 이인로가 지은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을 번역하여 서하집 국역본을 이인로 제단에 봉헌하였다. 이 춘향제에는 예천임씨종친회 임길상 회장, 서하임춘선생 숭모회 임영인 회장 등 종친회 임원 11명이 참석하였다. 또한 본 시제에는 오세재 선생의 후손인 고창오씨 문중에서도 임원 오민필 박사 등 4명이 참례하였다.

한편 인천이씨 쌍명재공파 종친회장도 예천임씨 시향제에 참석하는 등 문중 간 교류가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쌍명재 이인로」 라는 명칭은 죽림고회 3개 문중 후손들에 의하여 오랜 세월 전승되고 있다.

나. 인천이씨 대종회

인천이씨 문중은 수백년 전부터 인천이씨대동보에 이인로의 호는 쌍명재로 명시하여 널리 호칭하고 있다.

다. 예천임씨대종회

예천임씨 대종회가 발간한 서하집(西河集)에는 이인로의 호는 쌍명재로 명기하고 있다. 이 서적은 고려 예종 때 문장가인 임춘(林春) 선생의 작품을 이인로 선생이 편찬한 것이다. 원본은 원래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1984년 한글로 번역 발간하였다(1984. 7).  

예천임씨 대종회가 발간한 서하집 국역본 봉헌고유문에는 이인로의 호를 쌍명재로 명기하고 있다(2003. 4). 이 서하집 국역본은 이인로가 임춘의 시집 서하선생집을 발간한지 780년이 지난 2003년 예천임씨 문중에서 국역본을 완성하여 경남 의령군에 있는 이인로의 춘향제에 참석하여 고유 봉헌한 것이다. 죽림고회의 임춘선생 문중(예천임씨대종회)에서는 오래전부터 쌍명재 이인로로 호칭하고 있다.

라. 고창오씨 대종회

고창오씨 대종회는 죽림고회의 오세재 선생에 관한 현정일고(玄靜逸藁)를 발간하였다(1992. 10). 이 현정일고는 복양 문학시와 오세재 연구 등을 서술하고 선생의 십여편의 시에다 당시 제가의 증시 이십여편을 수집하여 편찬한 것이다. 본 서에도 이인로의 호는 쌍명재로 명기하고 있다.

고창오씨(高敞吳氏) 문중의 현정선생숭모사업회(玄靜先生崇慕事業會)에서는 복양 오세재 선생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발간하였다(2001). 여기에서도 이인로의 호는 쌍명재로 명기하고 있다. 죽림고회의 오세재선생 문중인 고창오씨대종회에서도 오래전부터 쌍명재 이인로로 부르고 있다.

 

4. 고려역사선양회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필승로 330-102에는 고려역사관과 고려통일대전이 있다. 고려통일대전의 정전에는 고려태조 왕건을 비롯한 역대 고려왕 34분의 위패와 고려조의 충신, 대학자, 대장군 등 377분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 매년 양력 10월초에는 고려조를 대표하는 우리나라 140여 성씨 문중이 모여 고려통일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이인로와 최당도 이곳 고려통일대전 정전에 모셔져 있다. 이인로는 좌간의대부 쌍명재공, 최당은 평장사 정안공으로 위패에 명시되어 있다. 우리나라 140여개의 성씨 문중이 참여하고 있는 최대규모의 시제인 고려통일대제에서도 이인로는 쌍명재(雙明齋), 최당은 정안(靖安)으로 호칭하고 있다.

 

5. 대학교수 및 석학들과 쌍명재 이인로

가. 저명 대학교수들의 저서

이인로는 우리나라의 한시 및 국문학과 저명한 교수, 석학, 후학들에 의하여 고려조의 학문과 사상을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문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동안 많은 대학교수 및 석학들에 의하여 파한집을 중심으로 이인로의 시문학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어 왔다. 이에 따라 최근 발간된 저서는 다음과 같으며, 본 저서들도 이인로의 호를 쌍명재로 명기하고 있다.

① 1980년대 출간된 서적 ⇨ 파한집(破閑集, 이태길, 부산대 강사, 1980), 서하집(西河集, 진성규, 중앙대 교수, 1984)

② 1990년대 출간된 서적 ⇨ 파한집(破閑集, 이상보, 국민대 교수, 1994), 한국한시작가연구(韓國漢時作家硏究, 이종묵,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1995), 파한집(破閑集, 전영진, 용인대 교수, 1995), 한국한시사(韓國漢詩史, 민병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문학박사, 1996)

③ 2000년대 출간된 서적 ⇨ 복양 오세재선생의 생애와 문학세계(윤영옥, 영남대 교수, 2001), 파한집(破閑集, 구인환, 서울대 사범대교수, 국어국문학회 대표, 2002) 외 다수

나. 쌍명재 이인로 문학비 건립

최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한시 및 국문학 전공 교수 및 문인 100인이 이인로의 높은 학문과 큰 뜻을 기리기 위하여 「쌍명재 이인로 문학비」를 인천시 연수구 연수동에 위치한 인천이씨 시조공을 모시는 원인재(原仁齋) 앞에 건립하였다(2001. 4. 5). 이 문학비에는 쌍명재(雙明齋) 이인로(李仁老)라고 명시하고 있으며, 이 문학비 건립에 참여한 한시 및 국어국문학과 교수, 문인 및 석학 등 총 92명은 다음과 같다.

① 한시 및 국어국문학과 대학교수(70명)

강재철(단국대), 김대행(서울대, 한국국어국문학회장), 김광순(경북대), 김기봉(서강대), 김대현(전남대), 김상태(숭의전), 김양동(계명대), 김일렬(경북대), 김정주(조선대), 김주곤(경산대), 김주한(영남대), 김성기(조선대), 김시황(경북대), 김신연(한양여대), 김신중(전남대), 김은주(광주대), 김일근(건국대), 김지용(단국대), 김진영(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문학박사, 미수 이인로 시집 저자), 김효율(인천대), 김해준(동국대), 김현룡(건국대), 권순열(조선대), 권태을(상주대), 남윤수(강원대), 류연석(순천대), 민병덕(성결대), 박길남(한남대), 박요순(한남대), 박용식(건국대), 박준규(전남대), 사재동(충남대), 성기조(교원대), 소재영(숭실대), 손팔주(신라대), 송성욱(부천카톨릭대), 신선희(장안대), 안동주(호남대), 우쾌재(인천대), 유재일(청주대), 윤덕진(연세대), 윤영옥(영남대), 이관일(장신대), 이금희(상지대), 이문규(부산교대), 이상보(국민대), 이성주(관동댸), 이석호(연세대), 이수봉(충북대), 이신성(부산교대), 이영찬(인천대), 이윤석(연세대), 이찬근(인천대), 이태종(경산대), 이태희(인천대), 이현수(조선대), 이형석(가천길대), 임성태(연세대), 원용문(한국교원대), 전재호(고려대), 정명기(원광대), 정규복(고려대), 정은임(강남대), 조규익(숭실대), 조동일(서울대), 최강현(홍익대), 최운식(교원대), 홍순석(강남대), 홍승오(서울대), 황순구(동국대)

② 수필가, 문인협회 등(13명)

김영수(고서연), 맹인재(문화재), 박도영(수필가), 배영희(민속연), 엄기원(문인협회), 성지월(시인), 이점성(수필가), 윤주홍(수필가), 조원희(고서연), 조상열(대동연), 호병규(수필가), 홍계신(수필가), 황강연(수필가),

③ 오세재 후손종친회, 관련단체 등(9명)

박기표(신문협회), 방극순(우중당), 송문호(자영업), 오민필(현정선생숭모사업회회장), 오윤필(현정공파대종회), 오해보(경주시), 윤형두(법무사), 이혜원(전교장), 장광덕(광명중)

다. 각종 정보매체와 쌍명재 이인로

고려시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이인로에 대하여 800여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나라 인터넷 및 수많은 정보매체에서 「쌍명재(雙明齋) 이인로(李仁老)」 라는 명칭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쌍명재는 이인로의 호(號)로서 일반국민들에게 대중화되고 일반화된 지 오래되었다.

 

6. 최당(崔讜)의 호에 대하여

최당의 호는 쌍명재가 아니다. 최당은 벼슬에서 물러나 쌍명재를 지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최당의 정자 이름이 쌍명재라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 저명 교수 및 대학의 한국학연구소는 최당에 대해서는 청하(淸河) 최당이라 부르고 있고, 시호는 정안(靖安)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정자 이름과 사람의 호는 염연히 다르다. 이에 관련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최태위의 쌍명정(雙明亭)이 있다(미수 이인로 시집, 경희대 김진영 교수)

② 최당(1135-1211)은 쌍명재를 설치하였고, 쌍명은 최당의 제호(齊號)이다. 청하(淸河) 최당으로 불리었고, 시호는 정안(靖安)이다(역주 파한집, 박성규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2012)

③ 최당의 시호는 정안(靖安)이다(파한집, 유재영, 원광대 교수, 1978)

④ 쌍명재는 최당의 제호(齊號)이다(파한집역주, 고려대한국학연구소, 2013)

특히 고려조 태조왕건 및 제왕, 충신, 대학자를 모신 고려통일대전 정전에도 최당은 평장사 정안공으로 위패에 명시되어 있다. 우리나라 어떤 역사적 기록이나 서적에도 최당의 호가 쌍명재라고 명시한 논문이나 서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누구도 최당을 쌍명재로 부르고 있지 않다.

 

7. 선인들의 성명과 호에 대한 일반적 이해

가. 호(號)가 만들어지는 경우

호란 세상에 널리 들어난 이름을 말한다. 이는 아호의 준말이며 본 이름 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을 말한다. 선인들의 호는 통상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만들어 지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① 스스로 지어놓고 불러 달라고 하는 경우, ② 문도들이 스승으로 숭앙하여 짓는 경우, ③ 후학들이 서로 통용하다가 자연스럽게 호가 되는 경우, ④ 후예들이 선조를 존경하여 부르면서 호가 되는 경우, ⓹ 동료들 사이에서 부르다 호가 되는 경우, ⑥ 출신지명으로 호가 되는 경우 등

여기에서 이인로의 별칭 쌍명재는 수백년이 흐르는 동안 위의 ③항 및 ④항의 경우로 생성되고 보편화되어 널리 부르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인로의 호(號) 쌍명재는 후손과 후학들에 의하여 생성 발전되어 왔다.

나. 성명(姓名)과 호(號)의 사용권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사람의 이름과 별칭(호)에는 독점권이나 특허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특정한 사람에게 그만의 이름이나 별칭을 독점적으로 사용하게 하고, 이를 타인은 사용할 수 없다고 정한 규정이나 법은 없다. 또한 타인이 자기와 같은 이름이나 별칭을 사용한다고 이의 사용을 금지할 수 없다. 어떠한 이름이나 별칭도 누구에게나 완전히 개방되어 있어 이를 사용함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

다. 이인로의 호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동명이인이 있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별칭(호)도 수많은 동명이인이 있을 것이다. 이인로의 경우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인로(李仁老), 미수(眉叟), 쌍명재(雙明齎), 청련(靑蓮), 와도헌(臥陶軒) 등으로 부르고 있다. 특히 쌍명재 이인로라는 이름과 별칭은 수백년전 부터 사용해 오고 있다.

그러면 이 성명과 호는 이인로만 사용하여 왔을까. 물어보나 마나 아닐 것이다. 지난 800여년 동안 이인로라는 이름을 사용해온 사람은 수없이 많았을 것이고, 미수, 쌍명재라는 별칭을 사용한 사람도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상당수가 이 이름과 별칭을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인천이씨 문중에서는 이인로라는 이름과 쌍명재라는 별칭은 이인로만이 사용해야 하니까 타인이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또한 설령 최씨 문중에서 최당의 호를 쌍명재로 사용한다 해도 인천이씨 종중에서는 시비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이름과 호는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와도헌유집(臥陶軒遺集)

 

이인로의 대표적인 호는 쌍명재(雙明齋)와 와도헌(臥陶軒)이다. 인천이씨 문중에서는 몇 년전에 와도헌유집(臥陶軒遺集)을 보유하게 되어 최근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고 있다. 본 유집은 서문(臥陶軒先生遺集序), 유집목록, 상권(臥陶軒先生遺卷之上), 하권(臥陶軒先生遺卷之下), 발문(跋)의 다섯 부분으로 구성 되어 있다.

 

먼저 이 유집의 서문은 후손 희석(羲錫)이, 발문은 후손 석영(錫永)과 강영(綱永)이 썼으며, 을미(乙未)년에 만들어 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1955년이나 1895년으로 환산되는데 서문과 발문을 쓰신 후손의 세대와 비교하여 볼 때 1895년으로 판단된다. 특히 하권에 수록되어 있는 파한집중간서(破閒集重刊序)는 중요한 사료로서 숭정대부 공조판서 홍문관 제학이신 인동장석룡(仁同張錫龍)이 쓰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 와도헌유집에 대하여 그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종인이나 학계에 계신다면 인천이씨 대종회로 연락주셔서 본 유집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도록 함께 노력하기 바랍니다. 또한 본 유집의 서문과 발문을 쓰신 분들이 인천이씨 쌍명재공파의 선대조인지, 타파의 선대조인지도 확인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