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씨와 당 황실

 농서이씨와 인천이씨

 

인천이씨 문중이 이씨(李)성을 득성한 역사적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중국 당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 이유는 당나라 황제로부터 황실의 성을 사성(賜性)받았기 때문이다. 수(隋)나라가 패망한 뒤인 서기 618년 이연(당고조)이 당(唐)나라를 건국하였으며 당조는 그 후 이세민(태종), 이치(고종)를 거쳐 제20대 애제를 마지막으로 289년을 지속하면서 세계성과 개방성을 보여준 강력한 제국이었다.

그 중 인천이씨의 득성과 관련된 사람은 당 현종(玄宗)이며, 그는 당나라 제6대 황제로서 712년부터 756년까지 재위하였다. 그는 본명이 이륭기(李隆基)로서 태종 이세민(李世民) 이후 당나라의 번영을 이끌었으나 동시에 쇠퇴를 가져오기도 한 황제로 평가되고 있다. 다시 말해 당조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그의 치세 말년인 755년에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에 의하여 소위 「안사의 난」이 발발하였다. 안록산은 당시 재상이었던 양국충(揚國忠)과의 권력다툼 끝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으며 이 난으로 인하여 중국은 다시 난세와 분열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안록산은 소구드 계통의 혼혈인으로 평로절도사의 양아들이었다가 그의 사후에 평로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범양절도사와 하동절도사를 겸임해 세 번진을 장악함으로서 휘하의 병력이 당조 전체병력의 37%에 달했다고 한다. 반란이 일어나자 현종과 양귀비(楊貴妃), 양국충 등은 모두 장안에서 피신하였으며 안록산은 한달만에 낙양을 점령하고 반년만에 장안을 점령하였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이 되자 현종을 호위하던 관군이 양국충의 목을 베어버리고, 양귀비를 죽일 것을 강요하여 현종은 어쩔수 없이 양귀비에게 자결명령을 내리게 되었다(756년). 그녀는 울면서 역관옆 나무에 목을 메어 죽었는데 그때 나이 38세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나라가 이러한 어려움을 당하게 되자 신라 경덕왕은 당시 아찬(阿湌) 벼슬을 하고 있던 허기(許奇)를 신라사신으로 당나라에 파송하였다(경덕왕 14년, 755년). 당나라에 도착한 허기 선조께서는 다른 나라 사신들과 함께 피난 중에 있는 현종을 끝까지 호종하였다. 관군들은 현종을 호위해 서쪽으로 행군하여 결국 촉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그 후 반란군에서는 내분이 발생하여 안록산은 둘째아들 안경서에게 살해되었으며 당나라 황태자 이형은 북쪽으로 올라가 황제(숙종)에 오르고 현종을 태상황으로 삼았다고 한다.

 

반란이 평정된 757년 12월 태상황이 된 현종은 장안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허기 선조님에게는 그동안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시서(詩書)와 당나라 황제의 성(李)을 사성받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 후 허기께서는 신라로 환국하시게 되자 신라 경덕왕께서는 소성백의 작위와 식읍 1,500호를 봉하셨다. 그 후 당나라 태상황 이륭기는 감로전에서 거처하며 쓸쓸한 노후를 보내다가 762년 5월 78세에 붕어하였다고 한다.

 

허기께서 환국 후 자세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허기 선조로부터 10세에 이르러 허겸 선조님부터 이(李)성을 사용하게 됨으로서 이허겸(李許謙) 선조님이 인천이씨 1세조가 되셨다. 여기에서 당나라의 이씨 성을 사용하게 된 인천이씨 문중 선조들의 생각을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쌍명재 이인로는 파한집(破閑集)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셨다.

 

배는 가을 매미 같고(腹若秋蟬)

목은 여름 자라 같네(頸如夏虌)

            <중 략>

누가 이걸 이름 지었는가(孰爲之名)

원효대사 라네(小性居士)

누가 이걸 찬했는가(孰爲之讚)

농서의 타리로다(隴西駝李)

 

이 시에서 말하는 농서는 당나라 황실성인 이씨(李)의 관향이다. 다시 말해 쌍명재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본인이 농서인(隴西人)임을 자연스럽게 밝히고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인천이씨 선조들은 당나라 황제로부터 이(李)씨를 사성받은 것을 영광스러운 사실로 받아들였다고 생각된다.

 

 

 인천이씨와 당 현종

 

1. 당 현종 시대

당나라 고종의 황후인 측천무후(側天武后)는 본명이 무조(武照)이며 14세의 나이로 2대 황제인 태종(太宗 626-649 李世民)의 후궁이 되었다. 태종이 죽자 장안의 감업사(感業寺)에 머물다가 3대 황제인 고종(高宗 649- 683)의 후궁이 되었다. 고종은 천황(天皇), 무후는 천후(天后)라 부르게 했다.

 

고종이 죽고 무후가 낳은 중종(中宗)이 뒤를 이었지만 불과 54일만에 동생 예종(睿宗 684-690)이 황제가 되었다. 그 후 예종의 셋째 아들인 이륭기(李隆基)가 거병해 위후일파를 제거하여 혼란을 종결하였다. 이때 예종의 양위를 받은 이륭기가 제6대 황제(玄宗 712-756)로 즉위하여 초년에 기강을 엄정히 바로잡아 농민생활에 안정을 주었고 호구 수가 당대의 최절정인 약 900만호에 이르러 경제적으로 안정되었다. 이를 개원의 치세(開元之治)라 부른다.

 

현종의 사호는 지도대성대명효황제(至道大聖大明孝皇帝)이고 약칭으로 명황(明皇)이라고 많이썼다(파한집 역주 2013, 280p,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2. 양귀비의 등장

당 현종의 비인 양귀비(楊貴妃 719-756)는 본명이 양옥환(楊玉環)이며, 쓰촨성(四川省) 촉주에서 태어났으며, 양귀비의 도호(道號)는 태진(太眞)이다(파한집 역주 2013, 390p,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그녀는 원래 현종의 18자(子)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가 되었는데 후에 현종이 그 미모에 반하여 자신의 비로 삼았다.

 

현종은 치세의 후반기인 천보(天寶) 년간이 되면서 정치에 싫증을 냈고, 도교에 몰두하어 부를 낭비했다. 또한 장안의 동쪽 교외에 있는 화청지(華淸池)에서 후궁 양귀비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한편 양귀비의 사촌오빠인 양소는 현종으로부터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승상까지 올라 국정을 전횡하였다. 이때 안록산(安祿山)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3. 안록산의 반란

현종 당시인 천보원년(742)에 변경에는 19개의 번진이란 군사통치기구를 두었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절도사를 두면서 점차 직업적인 모병제도가 일부 도입되었다. 당시 병제 전반이 부병제에서 모병제로의 전환은 당조에 재정의 부담이라는 문제를 안겨주었다. 부병제는 자비부담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당조가 군대를 유지하는데에 별다른 재정부담이 없었지만 모병제로 바뀌면서 병사의 의료와 식량 및 생활비까지 지급해야 하는 등 부담이 늘어났다.

 

여기에 이들을 거느리고 있던 절도사의 세력은 계속 강화되었고, 병사와 절도사 사이에는 수양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맺는 가부자 관계라는 사적인 관계가 성행해 군대 내에 사조직이 만들어졌다. 절도사는 일반적으로 장성 밖에서는 무장이, 장성 안에서는 문관이 겸임토록 했지만 점차 중앙정계에 영향력 있는 무관이나 이민족 출신을 장성 내의 절도사로 임명하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안록산(安祿山)이 등장할 수 있었는데, 안록산은 소구드 계통의 혼혈인으로 평로(平盧)절도사의 양아들이었다가 그의 사후에 평로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범양(范陽)절도사와 하동(河東)절도사를 겸임해 세 번진을 장악했는데 휘하의 병력이 당조 전체 병력의 37%에 달했다. 이후 당시 재상이었던 양국충(楊國忠)과의 권력다툼 끝에 반란을 일으켰다(755년).

 

그는 한달 만에 낙양을 점령하고 반년 만에 장안을 점령해 대연(大燕)을 건립했다. 그러나 각 지방에서의 강력한 저항과 위구르족의 반격을 받았다. 이후 반란군에서 내분이 발생해 둘째 아들 안경서(安慶緖)에게 살해되었다. 또 안경서는 부장인 사사명(史思明)에게, 사사명은 아들 사조의(史朝義)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장군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8년 동안 화북지역을 전란으로 몰아넣은 이 반란의 영향은 매우 지대했다(중국사, 2016년, 신성균, 윤혜영 저, 163-165p, 176-178p).

 

4. 당 현종의 피난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 군대는 안록산에 대패하면서 현종은 수도인 장안을 빠져나가 지금의 쓰촨성인 촉(蜀)으로 피난하게 되었으며 이때 양귀비와 양국충도 동행하였다(756년). 피난 도중 섬서성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러 전란의 원인이 된 양국충을 증오하던 진현래와 병사들은 양국충과 국부인들을 처형하였다. 이들은 현종에게 양귀비를 죽이라고 요구했고 현종은 어쩔 수 없이 양귀비에게 자살을 명해 목 매달아 죽었다(파한집 역주 2013, 121p,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안록산의 난이 평정된 후 현종에 이어 7대 황제에 그의 아들인 이형(李亨)이 숙종(肅宗 756-762)으로 황위에 올랐다. 현종은 여러명의 손자를 두었으나 그 중 광평왕인 이숙과 건녕왕인 이담 두 형제는 휼륭한 황제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8대 황제에는 그의 장손인 이숙이 대종(代宗 762-779)이 되었다.

 

5. 당 현종의 이씨 사성

신라 경덕왕 14년(755년) 허황후(許皇后)의 23세손인 아찬(阿飡) 허기(許奇)가 신라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을 때 그해 안록산의 난이 발생하여 현종이 촉으로 피난하게 되었다(756년). 그때 허기는 위험을 무릅쓰고 현종을 호종(扈從)하였으며, 그 후 난이 평정되어 장안으로 돌아온 현종은 그 공을 높이 평가하여 시서(詩書)와 황제의 성인 이씨(李氏)를 사성(賜姓)하였다(757년).

 

허기가 신라로 환국하자 신라 경덕왕은 그 공을 기려 소성백(邵城伯)의 작위(爵位)와 식읍(食邑) 1,500호를 봉하여 세습하게 하였다(758년). 우리 문중에서는 허기를 득성조(得姓祖)라 하고, 그의 10세손으로 고려 현종(顯宗)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이허겸(李許謙)을 인천이씨 시조로 모시게 되었다. 그 후 후손들은 이씨성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동안 경원이씨(慶源李氏), 인주이씨(仁州李氏)로 불리다가 현재 인천이씨가 되었다.